‘內觀’ 을 아십니까?

                   종교, 신을 위한 것인가?  

세계의 3대 종교는 기독교, 불교, 유교라고 하지만 그렇치 만도 않은 게 우선 기독교도 교파들이 달라 강조점이나 주장하는 바가 다르다. 불교도 그렇고 유대교, 회교도 종파들이 많은 것을 보면 신을 빙자한 인간들 종교에 가깝다. 불교는 오랜동안 아시아 특히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이는 종교라기 보다는 철학에 더 가깝다고 하는 데 스스로 꺠닳음의 과정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인생은 생노병사(生老病死)로 3가지 악을 피하라고 하는 데 이는 탐진치(貪瞋痴) 탐욕과 성냄, 무지다. 이런 큰 물음의 화두를 갖고 출가해 각(해탈)을 하기 위한 고행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편하게도 그런 것은 인간은 해결할 수 없다는 데서 출발한다. 그래서 신이 필요한 것이고 그 짊을 예수가 대속했다고 믿는 소위 타력구원으로 예수가 가르치는 것을 믿으면 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유교는 전통과 질서를 지켜가는데 ‘인의예지’ 나  ‘사단칠정’, ‘측은지심’ 이라는  인간으로의 도리를 강조한다. 그 외 다수 종교도 많치만 미개하고 원시적으로 출발해 특정 부족의 역사속에서 생성된 윤리로 그들 나름으로는 유익하지만 출발 지역이나 기원이 민족애와 집단성에 기초해 보편성을 갖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그것과 관련하여 이번에 소개를 하려는 것은 내관(內觀) 이라는 것인데 불교에서 나왔으나 천주교와 인성훈련으로 자리잡아 꽃을 피웠다고 한다.

   
 

이것을 처음 시작한 분은 일본인 요시모토 이신(吉本伊信), 기누코라는 부부다. 이것을 대중화한 것은 니시타 노리마사(西田憲正)로 1946년생 니혼대학을 나와 부친의 뒤를 이어 도요코인(東賓)이라는 비지네스 호탤의 회장이다. 현재 일본에는 15지역에 내관연수원이 있는 데 하코네국립공원내 연수원이 가장 유명하다. 이 회사는 물론 내관에 참여하려는 이들의 모임 장소다.

이러한 이론을 구체화하여 가족, 친구 일을 위하여 “자신을 알자” 라는 제목의 책을 냈는 데 세계적인 사업도 이룬 분이다. 그 비결은 모두 내관에서 왔다는 고백이다. 1946년생인 그는 32세에 부친이 경영하던 전기회사 직원으로 일하다가 부친 급거로 기업을 맡게된다. 그러나 경영수업이 안된 관계로 일에 대한 스트레스로 힘들어 하는 데 거래처 직원 소개로 내관프로그램에 참여를 하게 된다.

이후 인생이 180도 바뀐 그는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고 일과 사람에 대한 의미나 관계도 획기적으로 변화하여 성공적인 인생을 살게 되고 경영자로써도 큰 성공을 이룬 것이다. 그렇다면 그에게 있어서 내관은 종교 이상의 큰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다. 결국 종교는 그가 섬기는 신을 위한 것이라는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나 자신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종교든 내개 도전과 변화가 없다면 다시 한번 생각을 해봐야 한다.

현대 관서지방 고베의 트라피스트회 수도회 후지하라 천주교 신부가 바로 내관 프로그램을 운영자인데 지금은 면담만 한다. 필자가 오래전 일본에 거주할 때 내관에 대해 듣고 기회가 있으면 한번 직접 참가하고자 했으나 기회가 없었다. 이와 비슷한 것으로 한 때 한국에서도 트레디아스나 사랑의 동산, 혹은 mbti훈련이나 예수기도등이 있었다. 교회나 신자들 직장인들에게 큰 효과가 있었다고는 한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결국 사조직화되고 교권화되기도 한 것으로 듣는 다. 아직은 한국에서 내관을 경험하고 이끌고 계시다는 분은 못들어 봤다.  

   
 

내관의 출발 

內觀에서 얻은 유익은 그동안 나는 나 혼자 힘으로 살아온 것이 아니라는 점을 꺠닳게 되는 것이다. 부모님을 비롯하여 형제자매, 친척, 동료, 수많은 이들을 만나고 그들의 도움으로 오늘날 내가 있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대상화된 사람이 다르게 보여진다고 한다. 내관은 머리로가 아니라 가슴으로 마음 깊은 곳으로 부터의 자신을 회복하는 것이며 정직하게 피하고 잊고 싶었던 과거까지 기억해 내는 것이다.

원래 이 내관은 불교의 한종파인 ‘정토진종’ 에서 나온 ‘자기 주시하기’ 라는 데서 나왔다. 이는 자기도 모른 체 남을 알려고 하거나 안다고 하는 데 주관적으로 순서가 틀렸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이라고 진정한 자기성찰 없이는 성공할 수 없는 것처럼  자기의 부족함을 알아야 배울 것이고 더 좋은 사람이 되야지 해야 마음이 있어야 노력을 할 것인데 진짜 자기를 모르기 때문에 사람은 변화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잘났다고 하고 안다고 해도 이것은 제 3자가 그것을 알아주어야 의미가 있다. 그러니 소크라테스도 말했다는 ‘너 자신을 알라’ 라는 말은  자기를 아는 것으로부터 모든 것을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을 알아가는 과정은 일상속에서의 결단이나 종교의 힘만으로는 안된다. 오직 자기와의 시간을 통하여 생각을 통하여 기억을 통하여 회복할 수 있는 것이다.

내관의 방법

이 과정 출발은 조용한 공간에서 사방을 4칸으로 병풍으로 막고 한 방씩 이동을 하면서 생각을 하는 것인데 말하지 않고 자기혼자  생각을 해야 하는 것이니 대화하고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는 이들로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첫째 공간에서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며 연대순으로 부모님에게 받은 사랑이나 도움에 대하여 감사을 기억한다. 잘못을 했어도 자신을 지지해주시고 받아주신 것을 기억한다. 물론 반대 일 수도 있다.

그리고 나는 이에 대하여 보답했는 가?  또는 했다면 무엇으로 어떻게 있는 가? 하는 것이다. 또 부모와 같은 분에게 할 수 있는 가? 이렇게 부모님만이 아니라 가까운 형제자매, 친적, 이웃. 직장 동료등으로 확대한다. 여기 중요한 것은 자신을 언제나 중심으로 놓고 이것들과 연관하여 주시하는 것이다. 많은 경우 자신을 작게 하고 없게 하는 데 여기서는 자신이 주역이다.

   
 

주체성을 깨우는 유익

사실 내가 없으면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돈이나 국가, 권력, 명예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을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 노리마사는 이 내관을 통하여 사람과 일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으며 세상이 빛나고 몸이 상쾌하고 잊었던 것 불편했던 것이 새롭게 회복되고 회상되었다는 고백이다. 무엇보다 부모님에 대한 사랑의 재발견인데 그간 자기는 사랑받지 못했다는 잠재의식에서 부모님의 사랑을 받았다는 느낌으로 생의 큰 힘을 얻었다고 한다.

인간은 많은 경우 엉터리인데 늘 자기 합리화로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는 데 종교서 이게 형식적인데 부흥회서 소위 깨지거나 영적체험을 한다고 해도 이게 지속성이 없고 체화되지 않는 게 문제다. 자기 문제를 정면으로 부닥치면서 나는 무모하고 방자하고 가벼운 죄도 무시하는 경향을 인정하고 거기서 벗어나려고 하고 무례하고 건방지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에서 변화하는 인간이 되가는 것이다.

따라서 내관은 자기를 정면으로 드려다 보는 것이다. 그 과정에는 인도자가 질문을 적당한 시간에 질문을 환기하고 망상으로 빠지지 않토록 인도하지만 개입하여 조언이나 결론을 주지는 않는 다. 성경 히브리서에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라는 말씀이 있는 데 이것과 조화를 이룬 다고 본다. 기독교는 타력종교, 불교는 자력종교라는 데 불교는 자기 해탈을 자기 시간과 노력이 중요하기에 그렇다고 본다. 반면 기독교는 일단 맡기는 것으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다 해결을 했기에 이것을 믿으면 된다는 식이다.

자기 활용

그러나 막상 그 안으로 들어가면 ‘믿는 자 마다 구원’ 을 얻는 건 아니고 ‘택함을 받은 자라야 구원받는 다’ 고 한다. 그러한 택함이 무엇인가? 세례인가, 신자로의 의무인가? 여기서 복잡해진다. 예배엄수 물질생활 인가귀도는 사실 성경적인 것은 아니고 교회나 종단유지를 위한 것이다. 그러니 나 자신을 깊게 성찰할 수 있는 시간보다는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고 내라면 내는 피동적인 존재가 된다. 그리고 죄성은 깊어지며 다시 새출발들을 하지만 이런 인위적이고 외부적 요인으로의 회개는 길게 가지는 않는 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는 교회나 성직자를 의존하는 신앙에서 자기 구원과 해탈의 경지로 가는 것이 성숙한 신자의 도리다. 교파교회나 모이게 하는 것 돈을 내게 하는 것은 원래 기독교도 그렇고 종교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다. 석가모니는 왕자지만 그 지위를 버려 탁발을 했고 예수도 머리둘 곳이 없었다고 하셨다. 돈은 하나님이나 예수님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성직수행자들에게 필요한 것이다. 그들도 청빈과 가난으로 살아야 하나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다.

따라서 가족이나 아니면 친구들 아니면 동표들도 좋으니 몇 명이라고 단절된 곳에 가서 위에 열거한 방식으로 내관(자기 드려다 보기)을 하는 것이다. 그 방법은 1.은혜를 입은 것 2. 은혜에 보답한 것 3. 폐을 끼친 것을 순서대로 시간대별로 가까운 부모님으로부터 시작한다. 이후 형제자매, 친구, 동료순으로 자기를 주시하고 주체로 하여 성찰하는 것이다. 이것은 ‘알아차림‘ 이는 눈치나 감각이 아닌 마음의 트래이닝이라고 한다.

   
 

평가와 결론 

일본에서 이 모임에 직접 참여하지 못했지만 이를 경험한 지인으로 부터 들었다. 천성적으로 호기심이 많고 배우는 것을 좋아해 관심을 갖았다. 일본에 기독교는  천주교도 장로교도 한국보다 먼져 들어왔고 언더우드가 갖고 들어온 성경 쪽복음도 이수정이 일본서 번역한 것을 요코하마에서 인쇄한 것이다. 당시는 배로 움직이던 시대이니 선교사들이 고베로 들어와 신학원도 세윘고 오사카로도 배로 들어왔기에 가와구치에 성공회가 가장먼져  세워 진다.

그런데도 일본은 복음화율이 정체 정도가 아니라 묶여있는 데 그 원인 무엇인가? 선교사의 무덤이라는 말이 나오는 일본에서 그래도 교회는 영적으로 침체되지만 사라지지는 않고 있다. 그것은 적지만 버티는 힘이다. 어려서 부터 남의 일에 관여말라는 교육과 한번 약속한 것은 변치 않는 습성으로 적지만 일본교회는 버틴다.

그러나 1980년 이후 동경등 도심에서 일기시작한 오순절 계통의 부흥운동의 결실로 동경에서 가장 큰 요도바시교회가 미네노 다츠히로 목사의 뒤를 이어 김성섭목사가 후임이 된다. 그는 부친 김규동목사는 부산 동래교회 출신 평신도로 일본서 목사가 된 후 동경요한교회를 세우고 일본 전역에 요한교회 브랜치로 이름을 날렸던 분이다. 또 비슷한 오사카의 한 대형교회인 야호 그레이스교회에 후지사키 목사 후임에 한국인 김대홍 목사가 결정되었다. 

그럼 일본에서 왜 모이는 교회가 어려운가 그 이유는 바로 이들의 종교성에서 기인한다. 일본가정에는 신주단지가 있다. 고인들을 위패가 있는 것인데 가조들은 들고 날때 마다 그 앞에다 빌고 모신다. 신사도 특정한 곳에 가지 않아도 생활주변에서 많이 본다. 무교회주의도 일본에서 시작된다. 우치무라간쵸선생에 의하여 시작된 것이다. 이것이 모이는 교회가 약화되는 가장 큰 원인으로 보인다. 

종교는 성당이든 절이든 교회든 일잔 신자가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훈련된 성직자에 의하여 예전에 참여하면서 빌고 감화를 받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박해시대에 생존키 위해 이를 집으로 분산했다. 성직자나 성전을 찾을 필요없이 집에서 자신이 사제가 되여 빌고 구하면 돠는 구조다. 그러니 모이는 종교가 잘되겠는 가? 하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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