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청년운동의 태동과 민주화운동에의 참여 (1971~1972)

                            교회를 통한 기독청년운동의 전개

  1. 기독청년운동의 태동과 민주화운동에의 참여 (1971~1972)

한국 사회의 여러 모순이 축적되어가던 시기인 1960년대 말 이 같은 사회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몇몇 교회에서 청년회와 대학생회 활동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는데 이들을 중심으로 1971년 3월 21일 초동교회에서 서울지구교회청년협의회(교청)가 창립되었다. 교청의 조직이 가능했던 것은 격동하는 상황 속에서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는 한국교회와 60년대 해외로부터 들어온 진보적인 신학, 그리고 특히 KSCF의 활동에 영향을 받은 기독청년들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교청은 창립총회 취지문에서 밝히듯이 “오늘의 비인간화된 상황속에서 크리스챤의 자세를 확인하고 그동안 교회가 사명을 다하지 못했음을 비판하고, 교회갱신, 사회정의 실현, 한국적 진학의 수립은 기독청년들이 주축이 되어야만 가능한 것임을 확신하고, 그 구체적인 방안으로 교회갱신으로부터 시작하여, 연합활동을 통해 사회정의 구현을 위해 노력할 것”을 목표로 하였다.

교청은 「청년들은 죽었는가」라는 글에서는 “현 한국적 정치풍토속에서 행해지는 온갖 공공연한 불의와, 자유가 생명인 대학 사회의 교련강화로 인한 비민주화, 병영화의 기도와, 추악하고 나약한 채 이젠 입을 봉하고 쓰러져 버린 언론이 극도로 부패하고, 팽대한 권력에 업혀 방향을 상실하고 의의 역사에 역행해” 가고 있는 당시 한국의 상황을 소돔과 고모라에 빗대어 기독청년들이 의인 열 사람으로서의 자의식과 소명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기독청년운동은 이러한 노력 가운데도 교회청년이면서 동시에 대학생으로서의 자기 정립에 대한 회의와 비판이 심각하게 제기되고 있었다. 「부활주일을 맞는 우리의 자세」에서 “솔직히 이야기하자. 우리는 학원에서 도망쳐 나와 교회로 모여든 패잔병은 아닌가? 왜 교회운동이 학원 내의 학생 운동보다 못한가?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아직도 교회에 다니고 있다는데 대한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교회에 다닌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은 언론 규탄과 교련 반대에 앞장서는 학원에 계신다. 사회정의 실현이야말로 바로 교회의 할 일임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패잔병의 집단이요, 예수를 죽이는 로마 병사의 집단이다. 진정 하나님의 지체인 교회를 사랑하려면 지상의 교회를 떠나는 결단을 해야 하는 것이 오늘의 실정이다.”라는 자기 성찰은 기독청년운동 과정에서 지속되는 중요한 문제였음을 알 수 있다.

1971년 4월 10일 KSCF, 카톨릭학생연합회, YWCA 3개 단체가 ‘부활과 4월 혁명’이라는 주제로 기독학생연합대회를 치르는 가운데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행진을 하는 도중 무술경찰에 의해 학생들이 무수히 구타당하고 십자가가 부러지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충격 속에 교회청년들은 이틀 후인 4월 12일 교청 주최로 경동교회에서 부활절 기념예배를 마친 후 이 사건은 명백한 종교탄압이요, 신앙의 자유침해라고 규정하고 ‘교회는 죽었는가, 전 기독교인은 깨어나 자’는 등의 구호를 걸고 50여 명이 무기한 금식기도회에 들어갔다. 교청의 이 같은 행동은 곧 감신대, 한신대, 서울신대, 연신대학원생들의 농성과 데모로 이어졌다. 이후 교청은 1971년 4월 18일, 4월 27일에 있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신앙의 자유수호는 필연적으로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공명선거 감시운동으로 발전하지 않으면 않된다”는 「4.19 기독 청년 결의문」을 발표하고 선거참관인 운동을 실천할 것을 결의하며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끝까지 싸울 것을 선언하였다.

이 같은 연대운동의 의지는 4월 20일 교청, 전국 신학생 연합회, KSCF 3개 단체가 결합한 ‘민주수호기독청년협의회’(민기협)의 창립으로 이어졌는데, 종교교회 마당에서 치러진 결성식에 그들은 민주수호는 기독자의 양심으로 끝가지 지켜야 할 목표요 하나님 나라를 실현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요건이라 여기며, 민주수호를 위한 투쟁에 공동전선을 구축해 나갈 것을 결의하였다. 4월 23일 민기협은 새문안교회에서 ‘민주수호구국기도회’, ‘선거참관인 단합대회’를 개최하고 십가자 사건, 평화 시장 전태일의 분신자살, 한영섬유 노동자 김진수에 대한 드라이버 살인 미수사건 등 국가가 저지르는 폭력과 만행을 고발하면서 이러한 불의를 극복하고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한 보루로서 공명선거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4.27 선거가 공정한 선거가 되도록 참관인 운동을 벌일 것을 선언하였다. 민기협은 4월 27일 370명의 선거 참관인단을 조직하여 전국 각지에 배치함으로써 선거를 감시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 김대중 후보가 패하고 박정희가 당선되자 민기협은 이번 선거가 부정선거이며 전면적으로 무효임을 선언하고, 선거 후 대통령 조찬기도회에 모인 교계지도자들을 규탄하는 등 불의에 항거하지 못하는 교회들에 대해 비판하였다.

참관인운동을 통한 민주수호의 노력이 실패했지만 기독청년운동은 이에 굴하지 않고 민주화운동을 계속 이어나갈 것을 결의하고, 한영섬유 노조결성과정에서 드라이버로 살해된 노동자 김진수 씨의 장례식을 공동 주관하면서 처음으로 민중지향을 시도하는 등 계속적으로 확산되는 민주화 투쟁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교청운동은 KSCF 등과 함께 기존 교회를 중심으로 기반을 다져가면서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교회, 재야, 학생들과의 연합투쟁에 합류하였다. KSCF, YWCA, 교청 등 기독청년단체 지도자 70여 명은 8월 28~30일 아카데미하우스에서 전국 기독청년학생 지도자 수련대회를 갖고 ‘학원자유’, ‘부정부패 근절’, ‘교회갱신’ 등을 결의하였으며, 10월 11일에는 기독교회관에서 KSCF, 가톨릭학생연합회와 교청이 공동으로 ‘부정부패규탄 민주수호기독청년대회’를 개최하는 등 다양한 쟁점을 찾아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하지만 기독청년들의 이러한 적극적인 사회참여는 1971년 10월 15일 서울지역에 위수령이 발동되면서 큰 타격을 받게 된다. 개별적인 저항으로 새문안교회 대학생들이 10월 17일 ‘위수령, 휴업령 철회를 위한 금식기도회’를 개최하지만 국가의 강력한 탄압으로 제압당하게 되고, 이후 12월 국가비상사태선포, 1972년 10월 유신으로 이어지는 폭력적인 통제 상황 속에서 교청운동은 침체를 거듭하게 된다. 하지만 교청이라는 기구로서의 활동이 제약당하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기독청년운동은 개별 교회 단위에서 지속적으로 그 활동을 이어나가게 된다.

 

2. 유신체제의 등장과 기독청년운동의 전개 (1972~1975)

1972년 10월 17일 유신체제가 선포된 이후 한국 전반의 사회운동이 통제당하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기독청년들은 새로운 국면을 모색해나가게 되는데, 이들의 운동은 1973년 7월 ‘남산 부활절 연합예배사건’을 계기로 다시 활발히 전개되기 시작한다. 1973년 8월부터는 제일교회 대학생회가 중심이 되어 남산 부활절 연합예배사건으로 구속된 성직자와 학생을 위한 철야기도회를 시작하였는데 곧이어 서울 각 교회 대학생, 청년들도 이에 동참하였다. 창현교회 대학생회는 9월 2일 헌신예배에서 고난받는 민중과 연결되는 기독청년 문화권의 형성과 민주주의 실현에 앞장서자는 내용의 ‘한국기독청년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채택하였다. 수도교회에서는 10월 20일에 교회 대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민주수호기도회를 가졌으며, 11월 20일에 80여 명의 기독청년들이 모여 구속자를 위한 기도회를 갖고 구속학생 석방 및 학원자유 보장, 정보정치중지 및 중앙정보부 해체, 자유 언론 보장, 대일예속화 즉각 중지 등을 주장하는 ‘기독청년 선언’을 발표하였다

11월 27일에는 새문안교회 대학생회회원들이 언더우드 학술강좌를 마치고 교회 마당에 모여 우리나라의 이 어려운 사태는 우리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는 내용의 메시지를 낭독하고, 교회 사찰 중지, 구속학생 석방, 언론자유 보장, 한일 각료회담 반대 등의 플랭카드와 횃불을 들고 시위를 나섰다가 경찰에 의해 22명이 연행되었다. 또 11월 28일에는 NCC 주최로 6개 교단 연합 구국 기도회가 열린 자리에 다수의 교회청년들이 참석하여 종교자유의 보장, 중앙정보부 해체, 대일 경제 관계 중지, 자유 언론 확립 등을 주장하는 결의문을 낭독한 후 종교사찰 중지, 구속학생 석방, 언론자유 보장, 학원사찰 중지 등의 구호를 외치고 찬송가를 부르며 가두로 진출하여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리고 12월 2일 창현교회 청년회는 구국 기도회를 갖고 교회 청년들의 항거는 멈출 수 없다는 강한 의지를 표명하면서 교회사찰 중지, 민주체제 확립, 구속학생 석방, 한일각료 회담 취소, 어용 성직자, 지식인 회개 촉구 등을 요구하였다. 이처럼 교회청년운동은 남산 부활절 연합예배사건을 계기로 운동이 활성화되면서 유신 이후 침체되었던 상황을 극복해 나갔다.

위수령과 10월 유신 등 국가의 탄압이 강화되는 시기에 교청이라는 기구 중심의 활동이 제약 당했지만, 개별 교회 단위로 활동해 오던 기독청년들은 이러한 자발적 운동을 수렴하여 연합적이고 통일된 운동을 다시 한번 모색하게 된다. 그 결과 1973년 12월 8일 향린교회에서 새문안, 경동, 수도, 양광, 제일, 창현, 초동, 향린 등 8개 교회 청년회와 대학생회가 발기인이 되고 모두 20여 교회 청년회가 모여 ‘교회 청년 연합회’(교청연)을 재건하였다. 교청연은 1971년 ‘서울지구교회청년협의회’보다 폭넓은 기독청년들의 참여를 이루어냈으며, 이는 악화되는 탄압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운동을 이어나간 성과였다. 교청연은 교회갱신과 사회정의 실현이라는 두 가지 과제를 더욱 발전시키고자 하였는데, 이를 위해 교회개혁을 위한 ‘교회 갱신단’과 학사단 전통을 계승한 ‘청년사회개발단’이라는 두 개의 조직을 운영하였다. 교청연 또한 ‘유신헌법 철폐’, ‘대일예속화 중지’ 등을 주장하고 일본상품 불매운동의 전개하고자 하였으며, 초기 교청이 서울지역에 한정된 것을 극복하기 위해 전주, 대구, 부산 등 전국적인 조직확대를 시도해 나갔다.

새롭게 기독청년운동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1974년 4월 긴급조치 4호를 통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사건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 사건으로 KSCF와 교청연의 임원들 대부분이 구속되면서 큰 타격을 받게 된다. 이 같은 상황에서도 기독청년들은 1974년 10월 20일 새문안교회에서 400여 명이 모여 구속자를 위한 예배를 드리고 기독학생선언문을 발표하였으며, 11월 10일에는 경동교회에서 민주회복, 구속학생 석방, 유신철폐를 촉구하는 예배와 시위를 하는 등 운동을 전개해 나갔으나 민청학련사건 이전에 비해 활발하지 못하였다.

 

3. 긴급조치 9호 이후 유신말기까지 기독청년운동의 성숙 (1975~1979)

기독청년운동의 굴곡이 계속되는 과정 속에 1975년 5월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되면서 한국사회의 제반 민주화운동은 심각한 침체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그러한 상황에서도 기독청년운동은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게 되는데 각 교단 청년회의 재건 및 성격전환과 한국기독청년협의회(기청협, Ecumenical Youth Council in Korea: EYC)의 창립이 그것이다. 한국기독교장로회 청년회 전국연합회(기청)는 60년대 말 그 활동이 거의 중단되었는데 이후 각 노회단위로 청년회가 조직되면서 75년 새롭게 활동을 재개하게 된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청년회 전국연합회(장청)는 1970년대 초반부터 민주화운동에 참여해 왔던 예장 청년들은 70년대 중반 내부적으로 장청의 성격변화를 고민하면서 1977년 1월 대전에서 선교대회를 통해 분명한 전환을 갖게 된다. 이 선교대회에서 그들은 사회 불의와 부조리에 대한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하지 못한 것을 스스로 비판하고,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된 민중들과 함께할 것과 교회갱신 그리고 사회정의를 실현하는데 헌신할 것을 선언하였다.

 

기독교대한감리회 청년회 전국연합회(감청) 회원들도 70년대 중반부터 감청운동의 방향에 대한 고민을 갖기 시작하였고 이후 1978년 1월 서울 아현교회에서 청년선교대회를 열어 스스로에 대한 반성과 함께 교회갱신과 사회정의 실현에 앞장설 것을 선언함으로서 본격적인 성격전환을 이루어 냈다. EYC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지도자들이 기독청년운동의 활성화를 위해 노력하는 가운데 1975년 7개 지역의 지구협의회가 결성되고 각 교단청년들의(감청, 기청, 장청 등) 참여 속에서 1976년 1월 29일 70여 명의 지역, 교단 대표가 모여 창립총회를 개최함으로써 결성되었다. 이날 기독청년들은 EYC 창립총회선언문을 통해 에큐메니칼정신에 입각한 에큐메니칼운동으로서 사회정의구현과 교회갱신을 실현을 위해 앞장 설 것을 결의하였다.

1976년 이후 기독청년들은 운동의 다각화를 추진하면서 정치적 투쟁 중심에서 가난하고 병들고 신음하는 민중을 지향하게 된다. 각 교단 청년연합회, EYC 등은 도시빈민, 산업, 농촌 분과 등을 설치하고 야학, 빈민지역 실태조사, 농촌청년운동, 농촌 활동 등을 위한 노력들을 구체화 시켜나갔다. 이 같은 민중지향성은 KSCF의 학생사회개발단 운동의 계승과 전태일 사건으로 표면화된 노동문제, 광주대단지 사건으로 표출된 도시빈민문제, 이농과 저곡가에 시달리는 농촌문제 등 70년대 초부터 폭발되었던 기층 민중 문제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기독청년운동의 변화 가운데 또한 주목할만한 것은 10월 유신 이후 소수에 의해 시도되었던 탈춤과 연극 등의 문화운동이 1976년을 기점으로 교단청년운동에서 중요한 운동양식으로 자리 잡아갔다는 점이다. 1976년 5월 25~26일 세실극장에서 제1회 청년예수제가 EYC주최로 열렸으며, 6월 37일에는 기청 서울연합회 문화선교위원회 주최로 선교교육원에서 제1회 탈춤공연이 펼쳐졌다. 그리고 노래를 보급하는 형태로 문화운동을 실천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기독청년운동이 문화운동을 통해 대중성을 확보해가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와 함께 기독청년운동의 확장도 이루어졌는데, 부활절 연합예배 등 정규적, 비정규적 대중집회를 통해서 그리고 일반교회와 교단총회 및 NCC의 지원 속에 회원들에 대한 교육과 훈련을 실시를 통해 운동의 확산을 도모하여 갔고 그 결과 교단청년운동으로서 전국 조직의 차원으로 운동이 발전해갔다. 이렇게 기독청년운동이 교단내에 정착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이들의 민주화운동과 민중운동에의 참여가 보다 본격화되어 갔다.

1977년 4월 4일, 광주에서 열린 부활주일 연합예배에는 전남지구 EYC와 기청 전남연합회가 공동 주최하여 150여 명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청년들은 수난주일 신앙고백과 결의문을 통해 세계 속에서 사회정의, 자유, 평화를 외치며, 이 땅에 해방을 선포하러 오신 청년 예수의 발자취를 따르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들은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다음과 같은 결의를 했다: 1) 국민의 기본권과 생존권을 억압하는 법의 개혁과 자유민주주의의 회복, 2) 교회 사찰 중지의 선교자유 보장, 3) 언론과 집회의 탄압 중지, 4) 구속된 인사의 조속한 석방을 요구했다. 이 사건 및 기독청년들의 항의와 성명서의 배포 과정에서 총 6명의 임원이 구속되었다. 4월 24일에 향린교회에서 열린 부활절 연합예배는 기청 서울연합회 주최로 진행되었다. 이 자리에서 청년들은 장기집권에 따른 독재와 개인숭배 정책이 국가의 위기를 초래한다고 주장하며, 구속자 석방과 현 정권 퇴진 등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후 명동까지 구호를 외치며 이어진 시위로 회장이 구속되고, 10여 명의 회원이 연행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대립이 진행되는 동안, 장청, 감청, 구세군 등의 청년운동 단체들은 기도회, 강좌, 예배 등 다양한 대중 행사를 열어 기독교 청년들의 사회의식을 고양시키고 대중적 지지를 확대해 나갔다. 그리고 기독교 청년들은 안정된 기반인 EYC와 교단청년연합회를 중심으로 회보지, 뉴스레터, 신문 등을 제작하고 배포하여 대중에게 선전과 홍보를 진행했다. 5월 4일에는 EYC의 뉴스레터가 창간되었으며, 교단청년연합회도 독립적으로 회보를 발간하기 시작했다. 이후 11월부터는 EYC가 ‘한국기독청년’으로 회보를 발간하였으며, 이후 ‘한국기독청년신문’으로 명칭을 바꾸고 발행을 시작하였다.

1978년 8월에는 전주대회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은 8월 14일부터 17일까지 예정되어 있던 기청 제8회 전국 청년교육대회에 참가한 600여 명의 청년들이 8월 10일 저녁 6시쯤 인권 예배를 드리기 위해 대회 장소인 전주교대 부속 국민학교로 행진 도중 경찰과 충돌한 것으로 시작되었다. 경찰의 무분별한 폭력에 분노한 청년들은 전주역과 팔달고를 비롯한 전주 시내에서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많은 청년들이 부상을 입고 98명이 체포되었으며, 나머지 청년들은 중앙교회와 남문교회로 분산되어 단식 농성을 펼치고, 연행된 회원들이 전면 석방될 때까지 투쟁할 결의를 했다. 전주 지역의 목사와 신부들도 농성에 동참하였고, 서울 등 각지에서 교계 인사와 단체들이 전주로 모였으며, 전국적으로도 많은 관심을 집중시켰다. 당황한 당국이 한발 물러나며 소수의 인원을 제외한 시위 참여자들에게 어떠한 보복조치를 취하지 않겠다는 협상을 하자 22일 농성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당국은 이 약속을 지키지 않고 교육대회에 참가했던 많은 학생들에 대해 구속과 탄압을 가했다. 기청회원 등 500여 명의 청년들이 9월 4일 기독교회관에 모여 전주사건에 대한 정부의 이 같은 조치에 항의하는 집회를 열고 농성을 벌였는데, 이 사건으로 박형규 목사가 구속되었다. 이 사태는 기청 회원 300여 명이 모여 박형규 목사 석방을 요구하는 기도회로 이어지며 연쇄적으로 민주화운동의 열기를 고조시켰다.

1976년 이후 민중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기독청년들은 인선사 유령노조 사건, 무등산 타잔(박홍숙) 사건, 함평 고구마 사건, 동일방직 사건 등과 같은 민중생존권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특히 1977년 5월에 발생한 인선사 유령노조 사건에서는 노동자들에 대한 부당한 처우에 대해 인식하게 되면서, 해고된 노동자들의 복직을 위해 서명운동, 손수건 판매, 성명서 발표, 집회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쳐 복직 운동을 전개했고, 인선사 제품에 대한 불매 운동을 통해 해고된 노동자들의 복직을 이끌어냈다. 청계피복노조 노동교실의 폐쇄와 탄압에 대해서도 기독청년들은 서울제일교회에 모여 청계천 근로자를 위한 기도회를 개최하며 경찰들과 대치하기도 했다. 기독청년운동의 민중운동이 본격화되는 가운데, 1979년 8월 11일 YH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대해 개교회 청년들과 각 교단별 교청 회원들은 즉각적인 대처와 저항에 나섰는데, 이러한 운동이 결집되어 8월 24일 장청, 감청, 복음, 구세군, 성공회 등 여섯 개 교단의 청년회원 100여 명이 모여 기독교회관에서 YH사태와 선교자유 수호를 위한 기도회를 갖고 연합철야 농성에 돌입하게 되었다. 기독청년들의 민중운동은 이와 같은 개별 사건들에 대한 지원과 대응 뿐만 아니라 야학활동, 농촌활동, 빈민활동 등 민중들의 삶의 현장과 함께하는 참여를 통해서도 전개되었는데, 이 같은 다각적 활동을 통해 민중지향성을 심화, 발전시켜 나갔다.

하지만 이러한 운동의 확장은 격변의 시기 위기를 맞게 된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피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며 한국 사회의 정치적 공백이 일어나자 모호한 기대 속에 민주화의 요구가 증폭되는 가운데, 11월 24일 유신 헌법에 따른 간선제, 즉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대통령 보궐선거 저지를 목표로 하는 YWCA 위장결혼식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EYC 등 기독청년단체의 지도자들이 구속되거나 도피하게 되면서 기독교청년운동의 지도력이 약화되었다. 그 후 구심력이 상실된 상황이 지속되면서 기독청년들은 각 대학으로 또는 운동의 현장으로 흩어지는 등 그 활동이 점점 축소되었다.

4. 80년 이후 기독청년 운동

5.18 광주민주항쟁이 발생하며 여러 곳에서 개별적인 저항이 일어나는 가운데 5월 한빛교회 유인물 사건, 단성사 시위 미수사건, EYC 농촌분과장으로 활동하던 김의기의 기독교회관에서의 투신사건, 성남 주민교회 청년회원인 노동자 김종태의 분신사건이 발생했다. 그 외에도 기독청년들은 개인 또는 개교회 단위로 유인물 배포, 벽보 부착, 낙서 등의 방법을 활용하여 저항 시위를 시도했지만 상황을 변화시키지는 못했다. 이 동요와 실망의 상황 속에서, 기독청년운동 내부에서는 향후 운동의 방향설정에 대해 갈등과 분열이 나타났고, 일부는 운동에 대한 회의를 안고 교회를 떠나는 일도 발생했다. 기독청년 운동은 그렇게 올바른 방향을 설정하지 못한 채 80년을 지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기독청년들은 81년 한 해 전국대회, 연합예배, 성서연구, 교육훈련 등을 통해 그동안 약화 되었던 운동역량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기독청년운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은 81년 11월 3일 다락원에서 열린 기독청년운동 정책협의회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70년대를 평가하면서 한국 기독교 에큐메니칼 운동은 억압적인 유신체제 속에서 인권 및 민주화운동을 주도적으로 전개해 왔으며, 교회의 일치와 사회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노력을 통해 구체적 역사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건설에 동참하는 목표를 분명히 했다고 보았다. 그리고 한국기독청년운동은 한국 기독교 에큐메니칼 운동의 맥락 속에서 전위대적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였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80년대 새로운 국면에서 기독청년 운동은 매우 심각한 기로에 서 있으며 더 이상 기성권력의 퇴진을 요구하는 운동이 아니라 민중 세력에 기반을 둔 운동이 되어야 한다는 전망을 내세웠다. 그러면서 교회가 그러한 가능성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에 많은 기독청년들이 교회를 떠났다고 비판했다. 이러한 문제 인식에 따라 앞으로는 민중이 교회갱신과 사회변혁 운동의 주체가 되어야 할 것이라는 방향을 제시하게 된다.

이 같은 노력 가운데 기독청년운동은 82년 이후 활성화되기 시작한다. 82년 3월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이 발생하며 한・미관계를 둘러싼 문제가 전국적으로 확대되기 시작하자 서울지구 EYC는 4월 13일 새문안교회에서 부활절 연합예배를 개최하였다. 이 자리에서 지난날 안일했던 자신들의 태도를 반성하고 민주화 투쟁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다짐하며 미국을 비판하는 시위를 벌였다. 5월 18일에는 기장 전남교회와 광주 기독청년협의회가 공동 주최로 ‘제2주기 5·18추모예배’를 광주 YWCA회관에서 개최했다. 예배 후 분수대까지 행진하려 했지만 경찰들의 저지로 무산되었고 EYC회장을 비롯해 십여 명이 넘는 사람이 구속되기도 했다.

그리고 6월 14일에는 장청 주최로 기독교회관에서 구속자를 위한 기도회를 개최했는데, 이 자리에서 시국에 관한 신앙선언서를 발표하여 1명이 구속됐다. 7월 23일에는 미국계 다국적 기업인 콘트롤데이타노조 탄압에 대해 기도회를 개최하려 했지만 경찰의 방해로 중단되었다. 이 때 콘트롤데이터 사건에 대한 성명서를 발표했는데 이 때문에 EYC 총무가 구속되었다. 9월에는 원풍모방노조 탄압사건이 발생하자 기독청년들은 기도회 등을 통해 교회와 학생들과의 공동 지원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처럼 기독청년운동은 다양한 영역에서 활발히 전개되기 시작하면서 그 운동역량을 다시금 확대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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