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이들의 벗 로메로 신부
3월 24일은 남미 엘살바도르의 사제 오스카 로메로 신부가 순교한 날이다. 정부측의 사주를 받은 이들에 의하여 암살 당한 그는 “교회는 목소리 없는 자의 목소리가 되어야 한다” 라는 말로 대변한다. 이 말을 성공회대에서 은퇴한 권진관교수에 의하여 회자된 중요한 개념이다. 자신의 주장이든 이익이든 말할 수 없는 이들(MUTE)이야 민중이고 그들의 주장을 대변해주는 자들이 바로 성직자의 역할이고 사명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오늘 날 성직자는 교회나 성당에서 어떻게 소비되는 가? 부자나 권력자들의 친구가 되여 그들이 하는 일들을 축복하고 그들의 재화를 향유하고 있지는 않은 가? 그런 사람들을 많이 모은 조직이나 공동체는 그 돈으로 교권을 사고 지도자로 군림하며 최고급의 옷을 입고 차를 타고 생활을 하며 자녀들을 외국으로 유학보내고 그런 체제를 옹호하여 신의 뜻이라고 설교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로메로 주교의 삶에서 보는 바는 그것은 성직은 아니다.
1980년 3월24일 침묵을 깬 한발 총성이 녹음테이프에 기록되어 있다. 자신들의 정체를 폭로하고 가난한 이들을 선동한다는 이유로 정적화된 로메로는 그들의 표적이 되여 쓰러졌다 그들을 태운 빨간 파사트는 산살바도르의 거리 속으로 사라졌다” 엘살바도르 대주교로서 민중과 함께 박해받고 아파했던 오스카 로메로(1917~1980)의 최후 순간이다. 이러한 전기는 후대에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로메로는 대주교로 임명되기 전 정치적 개혁을 주장하는 사제들을 비판하던 보수적 성직자였다. 대주교가 돼 교회와 국가의 현실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그는 점점 민중의 편이 됐다. “민중의 고통을 깨달았고 절친한 사제가 독재의 칼끝에 비참한 죽음을 맞자 그는 한 순간에 바뀌었다”. “목소리 낼 수 있는 사람들은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분들을 위해서 그분들의 목소리를 전해주어야 합니다” 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
“나를 죽일수는 있어도 정의를 죽일수는 없다” “역사가 요구하는 생명을 건 모험을 피하지 말자” “불의한 명령이 아닌, 양심에 따르라” 형제들이여, 그대들도 우리들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대들은 그대들 형제인 농민을 죽이고 있습니다. 어떤 군인도 하느님의 뜻에 거스르는 명령에 복종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이야말로 그대들은 양심을 되찾아 죄악으로 가득한 명령보다는 양심에 따라야 할 때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아울러 날마다 더한 고통을 받아 그 부르짖음이 하늘에 닿은 민중의 이름으로, 나는 그대들에게 부탁하고 요구하고 명령합니다. 탄압을 중지하시오! -로메로 대주교 교황의 해방신학 사제 로메로 시성은 교회가 교회를 위해서만 존재해선 안되고 교회 밖을 위해 존재해야한다는 자신의 기존 주장에 따른 것이다.
엘살바도르의 로마 가톨릭 교회 대주교였던 로메로 주교는 엘살바도르 군사독재정권이 민주화 운동을 살인으로 탄압하자 군사독재정권에 대해 “불의한 명령이 아닌, 양심에 따르라”고,로마 가톨릭 신자들에게는“역사가 요구하는 생명을 건 모험을 피하지 말자”라고 호소하는 비폭력투쟁으로써 저항했다. 이런 목소리는 브라질 레시페의 대주교도 돔 헬더 카메라도 “내가 가난한 이들을 구제하자고 하면 그들은 나를 성자라 한다. 그러나 그들의 가난에 대하여 관심갖으면 나를 공산주의자라고 한다.
1980년 3월 24일 프로비덴시아 병원 경당에서 미사를 집전하다 엘살바도르 군사독재정권에게 암살당했다. 로메로 암살의 배후는 1993년 유엔이 지명한 ‘엘살바도로의 진실에 관한 위원회’에 의해 수천명의 증언을 토대로 군부지도자들의 지시에 의해 조직적으로 이뤄졌음이 드러났다. 그 위원회는 프란치스코 교황과 같은 소속인 예수회 신부 6명도 국방장관의 지시를 받은 특수 비밀부대에 의해 암살됐음을 밝혀졌다.

로메로 신부의 출생과 성장
로메로 대주교는 목소리 낼 수 있는 사람들은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분들을 위해서 그분들의 목소리를 전해주어야 합니다. 1970-80년대 남미 군부 독재 저항운동의 상징이 된 성 오스카 아르눌포 로메로(Oscar Arnulfo Romero y Galdamez)는 1917년 8월 15일 엘살바도르(El Salvador) 동부 산미겔(San Miguel)의 시우다드 바리오스(Ciudad Barrios)에서 산토스 로메로(Santos Romero)와 과달루페 데 헤수스 갈다메스(Guadalupe de Jesus Galdamez)의 6남 2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3년간 공립학교를 다니고, 지역 가정교사의 지도를 받은 후 목공 일을 배우던 그는 목수가 되길 원하는 아버지를 설득해 1930년, 열세 살의 나이로 사제가 되고자 산미겔에 있는 소신학교에 입학했다. 소신학교를 졸업하고 산살바도르에 있는 국립 신학교에 입학해 수학한 후 1937년 이탈리아 로마의 그레고리안 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1942년 4월 4일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그의 가족들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여행 제한 때문에 서품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로마에 머물며 수덕 신학 박사과정을 밟던 중 엘살바도르에 사제가 필요하다는 교구장의 부름을 받고 1943년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아나모로스(Anamoros)에서 본당 사제로서 첫 사목활동을 시작한 후 산미겔로 이동해 교구장 비서, 교구 신문 편집장, 주교좌본당 주임, 소신학교 교장 등을 역임하며 20년 이상을 보냈다. 주요 직책을 수행하면서 그는 가톨릭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을 수호하는 일에 전념하며 상당히 보수적 인물이 되었다.
1966년 엘살바도르 주교회의 사무처장으로 선출되었고, 1970년에 산살바도르 대교구의 보좌주교로 임명되었으며, 1974년 가난한 시골 지역인 산티아고 데 마리아(Santiago de Maria) 교구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이때까지도 그는 조용하고 학구적인 성품의 보수적 주교였다. 1977년 2월 23일, 로메로 주교가 산살바도르 대교구의 교구장 대주교로 임명되었을 때 정부와 기득권 세력으로부터 환영받았지만,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위해 헌신하던 많은 사제들은 실망감을 감추지 않았다.
당시 엘살바도르는 열네 가문의 지주들이 전체 경작지의 60%를 소유했고, 이 지주들은 대통령과 국회의원, 국가방위군과 경찰의 보호를 받았다. 이들에게 방해가 되는 이들은 무참히 학살당하거나 실종되기 일쑤였다. 그중에는 가난한 소작농들뿐만 아니라 불의를 고발하고 정의를 외치던 사제와 수녀들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로메로 대주교는 아주 특별한 사건을 경험하기 전까지 이러한 비참한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평범한 신부에서
그러던 중 그가 산살바도르 대주교로 임명되고 3주도 지나지 않은 3월 12일, 가난한 소작농들을 변호하고 그들을 위해 헌신했을 뿐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오랜 우정을 나누던 예수회의 루틸리오 그란데(Rutilio Grande) 신부가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란데 신부가 아길라레스(Aguilares) 성당에 미사를 봉헌하러 가던 중 암살단에 의해 피살된 것이다. 이 사건은 로메로 대주교의 삶에 일대 전환점이 되었다. 그는 정부의 신속한 수사를 촉구했지만 그의 요구는 무시되었고, 검열을 받는 언론은 조용하기만 했다.
그란데 신부의 장례미사가 열리던 날, 그의 교구에서는 단 한 대의 미사만 봉헌되었다. 산살바도르 대교구의 사제들과 신자들이 주교좌성당에 모였다. 그는 강론 중에 “살인한 형제들이여, 당신들에게 말하고자 하노니, 우리는 당신들을 사랑하며 하느님께 당신들의 마음을 대신해 참회를 빈다. 왜냐하면 교회는 증오할 수 없으며 어떠한 적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했을 뿐만 아니라 “이 자리에 모인 사제 가운데 한 명이라도 건드리는 것은 곧 나를 건드리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정부의 면담 제의도 거부하고, 전국에 방송되는 라디오를 통해 주일마다 고문당한 이들과 살해당한 이들, 투옥된 이들과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강론을 했다. 그는 더욱 용감하게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폭력에 맞섰다. 하지만 군사정권의 만행과 박해는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이를 지켜볼 수 없었던 로메로 대주교는 주저 없이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 편에 섰고, 빈곤의 문제와 사회 정의에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교구장 재임 기간 내내 살해 협박에 시달리면서도 위축되지 않았다.
그럴수록 미사 강론과 교회 언론을 통해 정부의 부당함을 고발하며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의 기둥으로 우뚝 섰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듯 피살되기 얼마 전 한 기자에게 털어놓은 말은 그의 유언이 되었다. “그들이 나를 죽인다면, 엘살바도르 민중 가운데 부활할 것이다. 살해 위협이 현실로 드러난다면, 그 순간 엘살바도르의 구원과 부활을 위해 내 피를 하느님께 기꺼이 바칠 것이다. 내 피를 희망의 표지와 자유의 씨앗으로 삼으소서!”
피살되기 하루 전에도 그는 강론을 통해 엘살바도르의 군인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고, 인권에 대한 억압과 폭력을 저지르는 정부의 뜻에 따르지 말 것을 호소했다. 그는 1980년 3월 24일 저녁, 산살바도르의 ‘하느님 섭리의 병원’ 성당에서 암 환자를 위한 미사를 집전하며 강론을 마치고 제단 중앙에 섰을 때, 성당 앞까지 자동차를 타고 온 무장괴한으로부터 가슴에 총을 맞고 숨을 거두었다.
그를 암살한 무장괴한들의 정체는 후에 밝혀졌는데, 미국 특수전 사령부에서 군사 훈련을 받은 예비역 장교들이 군사정권의 사주를 받아 저지른 만행이었다. 3월 30일 산살바도르 대교구 주교좌성당에서 거행된 그의 장례미사에는 25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석했고, 그의 시신은 주교좌성당 지하에 안치되었다. 로메로 대주교의 시복 절차는 1990년대 초반부터 시작되었지만, 그가 신앙 때문에 순교한 것인지 정치적 이유로 살해된 것인지에 대한 의견이 엇갈려 시복 재판이 한때 중단되기도 했다.

로마 천주교 로메로의 순교성인 선포
그 후 2007년 5월 베네딕토 16세(Benedictus XVI) 전임 교황이 “로메로 대주교는 그리스도의 미덕을 실천한 위대한 신앙의 증인”이라고 평가하면서 새 전기가 마련되었고, 프란치스코(Franciscus) 교황이 2015년 2월 로메로 대주교의 죽음을 순교로 인정하고 그를 순교자로 선포하면서 시복 일정이 확정되었다. 2015년 5월 23일, 산살바도르 시내 광장에서 교황청 시성성 장관 안젤로 아마토(Angelo Amato) 추기경 주례로 로메로 대주교의 시복 미사가 거행되었다.
시복식을 주례한 안젤로 아마토 추기경은 “로메로 대주교의 정신은 현재에도 살아 숨 쉬며 지구상에서 소외당하는 이들에게 위로를 전해주고 있다”고 언급하고, “가난한 이들을 향한 그의 선택은 이념적이지 않고 복음적이었다”며 “로메로 대주교는 분열이 아니라 평화의 상징이며, 아메리카 교회를 빛낸 별”이라고 말했다. 이날 시복 미사에는 주변 남아메리카 대통령들과 추기경들을 비롯해 30여만 명이 모였다. 제단은 로메로 대주교가 피살 당시 입었던 혈흔이 묻은 주교복과 꽃과 초로 꾸며졌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8년 10월 14일, 제15차 세계주교대의원회의 기간 중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그의 시성 미사를 집전했다. 전 세계에서 7만여 명의 신자들이 참례한 시성식에서 로메로 대주교뿐 아니라 바오로 6세(Paulus VI, 9월 26일) 교황을 포함해 모두 7명의 성인이 새로 탄생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강론에서 로메로 대주교와 바오로 6세 교황에 대해 성덕을 삶을 살아가면서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교회의 증거자였다고 극찬했다.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모든 위험을 무릅쓰는 용기 있는 선택을 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할 것”이라며 “오늘 시성된 성인들은 이 길을 따랐다”고 덧붙였다. 교황은 이날 시성식 미사에서 로메로 대주교의 혈흔이 남아 있는 띠를 매고, 바오로 6세 교황이 사용하던 팔리움과 목장, 성작을 사용했다. 두 성인은 서로 개인적으로도 연결되어 있는데, 바오로 6세 교황은 로메로 대주교를 주교로 뽑았고, 후에 산살바도르 대교구장으로 임명했다.

엘살바도르 나라는?
엘살바도르 공화국(스페인어: República de El Salvador, 영어: Republic of El Salvador, 문화어: 엘쌀바도르)은 중앙아메리카에 있는 공화국이다. 온두라스, 과테말라와 국경을 접하며 남쪽으로 태평양에 접한다. 수도는 산살바도르이다. 면적은 21,041km2, 인구는 약 600만 명(2024년)이다. 공용어는 스페인어이며, 스페인어권 나라 중 유일하게 나라 이름에 정관사(el)를 붙인다.
1521년 에르난 코르테스가 아즈텍 제국을 정복한 것을 시작으로 스페인 제국의 메소아메리카 정복이 시작되었다. 1524년 페드로 데 알바라도가 이끄는 부대가 이 지역으로 침공하여 정복에 성공했다. ‘엘살바도르'(El Salvador)라는 국명은 스페인어로 ‘The Saviour(구세주)’라는 뜻으로 페드로 데 알바라도 장군이 산맥을 넘어 이 땅에 도달한 뒤 구세주 예수님께 감사하라는 의미로 명명하였다.
한편 1821년 인근의 과테말라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이 성공한 결과로 스페인은 정치적으로 유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중앙아메리카 전역의 독립을 승인하였다. 이에 따라 엘살바도르는 과테말라와 온두라스, 니카라과, 코스타리카 등과 함께 중앙아메리카 연방 공화국을 결성하였으나, 각자의 입장 차이와 이권 다툼으로 연방은 와해되었고, 엘살바도르 지역은 1841년 엘살바도르 공화국으로 독립한다.
1913년에는 마누엘 엔리케 아라우호 대통령이 임기 중 살해되었다. 이후 멜렌데스와 키뇨네스의 독재가 이어지다가 1931년 3월 최초로 자유 선거를 통해 아르투로 아라우호 대통령이 취임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 부통령이던 막시밀리아노 에르난데스 마르티네스의 공모로 하급 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아라우호의 정부는 9개월 만에 무너졌고, 마르티네스가 대통령직에 올랐다. 1932년부터 공산주의에 영향을 받은 농민 및 원주민의 반란이 여러 차례 일어났고 마르티네스 군사정권이 이를 잔혹하게 진압하며 라 마탄사(La Matanza)로 불리는 학살이 벌어졌다.
1944년 다시 쿠데타가 발생하였다가 진압되었으나 이를 계기로 마르티네스는 사임하고 해외로 망명했다. 이후 쿠데타가 반복되며 군사독재 정권은 1979년까지 이어졌는데, 이는 소수의 군인정치가들과 이들을 지지하는 지주들이 권력과 부를 독점한 과두 정부였고 대부분 지주 계급으로 구성된 과두 정부에 의해 많은 농민이 살해당하거나 난민이 되어 반정부 감정이 갈수록 고조되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엘살바도르는 높은 인구밀도로 토지 부족에 시달렸고 이에 따라 인접한 인구 밀도가 낮은 온두라스로 엘살바도르인들이 유입 및 불법 정착하여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 간에 긴장을 야기하였다. 1969년에는 국경 분쟁 및 온두라스로 유입된 엘살바도르인들의 지위 문제 등 알력이 있었던 온두라스와 축구 시합을 계기로 축구 전쟁이 벌어졌다.
1979년 다시 쿠데타가 일어나 엘살바도르 혁명정부라는 군사정권이 세워졌다. 초기 혁명정부는 온건 사회주의자들이 주도하여 민간 기업들을 국유화하고 사유지들을 인수하였으나 농업 개혁에 반대하는 강력한 과두제 엘리트의 압력으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고 급진 좌파 단체에 대한 탄압을 지속하였다. 결국 1980년 좌파 계열 게릴라 단체들이 연합하여 국민해방전선(FMLN)을 형성하고 군사 정권과 엘살바도르 내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특히 엘살바도르 로마 가톨릭교회의 지도자로서 민주화 운동을 주도해 오던 오스카르 아르눌포 로메로 대주교가 정부에 의해 암살당한 것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로메로 대주교는 엘살바도르인들에게 “구원은 죽어서 피안의 세계로 가는 것이 아닌,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키는 것”이라며 민주화 운동 참여를 독려하거나 미사 중에 강론할 때마다 군사 정권을 비판하였다.[6] 당시 미국은 좌파 반란의 확산을 막기 위해 제2의 군사정권 창설을 지지하고 자금을 지원했으며, 호세 나폴레온 두아르테가 베네수엘라 망명 중 소환되어 혁명정부를 대체한 새로운 정권을 이끌게 되었다.
1992년 1월 16일 엘살바도르 정부와 국민해방전선이 UN의 중재로 차풀테펙 평화협정에 서명하며 내전은 종식되었고, 이후 정치는 비교적 안정되었다. 협정에 따라 국가는 군대의 규모를 줄이고 경찰과 민간 방위군을 해산하여 시민경찰로 대체하였으며 진실위원회를 설치하여 내전 중 발생한 심각한 인권침해에 대한 조사에 나서게 되었다. 국민해방전선은 무장을 해제하고 합법 정당으로서 선거에 참여하게 되었다.
1989년부터 우파의 민족주의 공화 동맹이 계속 선거에서 승리하여 집권하다가 안토니오 사카 대통령의 부패 논란 속에 2009년 처음으로 FMLN 소속의 전 언론인 마우리시오 푸네스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2014년에는 내전 당시 게릴라로 활동하던 전 FMLN 지도자 살바도르 산체스 세렌이 대선에서 승리하였다.
2022년부터 부켈레 정부는 범죄단체와 갱단 관련 폭력에 대한 전쟁을 시작하여 3월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5만 명 이상의 용의자를 체포하여 구금하였다. 2024년 2월 4일 치러진 선거에서 부켈레 대통령이 83%의 압도적인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했으며, 그의 새로운 생각당은 의회의 60석 중 54석을 차지했다.
대다수의 주민(90%)이 메스티소(백인과 인디오의 혼혈)이며, 나머지는 백인(대부분이 스페인 출신, 나머지는 포르투갈, 이탈리아, 프랑스 출신) 9%와 인디오 1%이다. 인구 밀도는 과밀의 정도가 아니라 포화 상태에 이르고 있어, 국외로의 인구 유출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인구 증가율도 3%를 넘는다. 내전 기간 중에 많은 엘살바도르인이 미국으로 이주하였고, 내전이 종식된 현재도 국외 유출 인구는 꾸준히 늘고 있다. 노동 인구의 약 30%가 농업에 종사한다(1999년).
엘살바도르는 중미에서는 공업이 가장 발달하였으나, 농업이 여전히 국가 경제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주요 재배 작물은 커피, 사탕수수, 면화 등이며 미국계 거대 곡물 자본도 진출해 있다. 농업 생산량은 국내의 과밀한 인구의 수요를 충족하지 못하여, 부족분을 수입하고 있다. 산업 시설은 수도인 산살바도르에 집중되어 있어 산살바도르 지역은 공해 및 지방에서 밀려드는 빈민 계층으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고, 1인당 국민 소득은 4,700달러 정도이다. 독자 화폐 단위인 콜론을 1919년부터 2001년까지 사용하였으나, 그 후 미국 달러를 자국의 기축통화로 도입하였다.
공용어는 스페인어이다. 교육 받은 사람은 영어를 할 줄 아나, 관광 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기본적인 스페인어가 필수이다. 엘살바도르에서 사용되는 스페인어는 중앙 아메리카 스페인어의 일부로서, 지리상의 근접에도 불구하고 멕시코보다는 콜롬비아쪽에 더 가깝다. 소통에는 문제가 없으나, 사용하는 특정 어휘에 나라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으며, 너(tu)를 vos라고 하는 등, 기본 어휘에 차이가 있는 경우도 있다. 다른 중앙아메리카 국가와 달리 엘살바도르에서만 사용되는 칼리체라는 슬랭이 유명하다

오스카 로메로, 군부독재에 맞서 사랑을 외치다- 케빈 클라크 지음, 가톨릭출판사
로메로 대주교가 활동하던 시기 엘살바도르는 부익부 빈익빈이 심화되는 엄혹한 군부독재 치하였다. 로메로는 대주교로 임명되기 전 정치적 개혁을 주장하는 사제들을 비판하던 보수적인 성직자였다. 대주교가 돼 교회와 국가의 현실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그는 점점 민중의 편이 됐다고 한다. “민중의 고통을 깨달았고 절친한 사제가 독재의 칼끝에 비참한 죽음을 맞자 그는 한 순간에 바뀌었다”.
저자는 로메로 대주교의 강론과 일기, 그의 형제들과 친구들의 증언 등을 통해 로메로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신중한 성직자에서 민중의 변호자로 바뀌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 설명한다. 농민들과 땅바닥에 앉아 성경을 해석하며 그들에게서 지혜를 들었던 일, 토지개혁을 위해 전국의 성직자들의 의견을 모았던 일, 신성모독을 당한 마을사람들과 군인들 앞으로 전진했던 일 등은 그가 순교의 길을 걸어가게 된 것이 단 한 순간의 회개 때문이 아니라는 알려준다.
출판사는 “이 책에 담긴 로메로의 일화들을 통해 독자들은 한 사람의 회개가 어떻게 신앙을 증거하는 순교로 이어지고 한 나라의 희망의 표지가 되는지를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밝힌다. 로메로 대주교의 이웃, 민중에 대한 사랑과 신앙은 “저의 민중이 보호받지 못하는 동안에는 저도 보호받고 싶지 않습니다. 민중과 더불어, 저는 제 성소가 저에게 요구하는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자 합니다”라는 발언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