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어떻게, 무엇으로 작은 이들의 벗이 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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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교단은 나름대로 여러 가지 차원의 숙의와 성찰, 웍샾과 세미나를 통해 오늘 우리 시대와 사회의 화두가 “새로운 희망의 갈망”, “ 깊은 위로와 치유, 격려”에 있음을 발견하고 착안하여 제97회기 총회 주제를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으로 정하여 공표하였다 .
그리하여 “작은 이들의 희망”이 되어볼 의지로, 전반적이면서 지향적으로는 “치유와 생명 공동체 운동”을 내세우면서, 보다 실제적으로는 1) 가난한 이들의 벗, 2) 다음 세대의 벗, 3) 장애인의 벗, 4) 다문화 가족의 벗, 5) 북한동포의 벗이 되는 일을 영역별로 설정하였다.
아마 연말 성탄절을 전후하여 보다 구체적으로 실천방안을 마련하여 교단적으로, 노회적으로, 지교회 차원에서 전개해 나갈 방침인 것으로 알고 있다.
평가하기에 따라서는 매우 시의적절하고, 시대의 요구 상황을 잘 짚어나가는 일이라 보아 퍽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아무쪼록 시대를 살아감이 아프고 고단한 “작은 이”의 위로와 격려, 치유와 회복, 용기와 희망이 되어나가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염려되는 것은, 언제나 그렇지만 이번에도 소리만 요란한 냄비 끓는 듯한 몸짓과 구호와 선전적 차원에서 자기들만의 맴돌기로 그치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일이다. 이미 몇 년 전에 “섬겨야 합니다”라는 주제를 내걸고 지내본 일이 있기 때문에, 필경은 그 수준을 넘어서기가 어렵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솔직히 현실은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짐”, 또는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부담, 거북함”인 게 사실이고, “작은 이들의 벗”이기 보다는 “작은 이들의 멋”노릇이나 하려들지 않을까? 의구심의 대상이 되어있음에 유의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오랫동안 묵묵히 응달과 그늘진 곳에서 소리 소문없이 ”작은 이들의 친구, 약한 이들의 상대“가 되어 활동해 오던 많은 활동가들은 오히려 냉소와 회의, 뭔가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는 느낌들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프로그램과 켐페인, 구호와 선전, 기념 촬영식 행사치레나 이벤트로 흐르지 않도록 각별히 유의하여야 할 것이다. 용어와 개념 하나에 현실적인 충분한 연구와 검토, 성찰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진정성일 것이다. 과제는 총회가 의식하고 주창하는 주제와 그 컨덴츠를 어떻게 전 교회적이고 개교회적 차원으로 공감과 인식을 함께 하며, 실제 “교회의 삶”으로 형성해 내느냐?이다.
매년 되풀이 되는 일이지만, 총회의 주제가 일선 교회와 목회현장 및, 생활일선에 나아가는 그리스도인 개개인에게는 생소하고 낯설고 연결성이 없지 않았는가? 총회와 노회, 교회와 교인 모두 저 마다 따로 따로 아니었는가? 진행을 맡은 실무자들은 현실과 상황에 더 깊이 주의집중하고 밑바닥에서부터 모든 일을 시작해 나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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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누가 과연 “작은 이들”인가? “작은 이들”을 말하기에 오늘 교회는 너무 커져 있지 않은가? 그리고 대다수 교회들은 오히려 “세상 보다 더 작지 아니한가….?” 어느 하나도 쉬운 일은 없다. 다같이 좀더 연구하고 좀더 생각하고 좀더 고민하고 좀더 지혜를 찾아 나가보록 하자.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 참 좋은 말인 데, 그런데 왜? 뭐가? 생뚱하고 낯설고 멀게만 느껴지는 것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