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세 다쓰지(布施辰治 ふせ たつじ) 을 아십니까?

.         후세 다쓰지(布施辰治 ふせ たつじ) 을 아십니까?

정준현 선생의 끈질긴 노력으로 빛봐(후세 변호사 연구 모임 대표)

정준현 선생의 약력/ 고려대학교 졸업,한국 수자원 공사 재직, 농수산물 공판장 전무, 산성교회 집사

   
 

후세변호사 생애 1880년 ~ 1953년 미야기 현 이시노마키 시 출생, 일본 인권변호사,사회운동가
http://www.youtube.com/watch?v=rCX-H0P0Q9w(영화)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4087302

2004년 일본인으로는 최초로 대한민국 건국훈장(애족장)을 수여받음,  일본에서 그의 일대기가 영화로 제작되여 방영 됨 

   
 

미야기현의 한 농가에서 3녀 2남중 막내로 태어나 메이지 대학을 졸업,검사가 되어 우쓰노미야 지검에 부임. 동반 자살 미수로 자수한 어느 어머니를 살인미수로 기소해야 하는 현실을 보며,법률의 사회적인 미비와 적용에 회의를 느끼다 검사직을 사임하고 변호사가 되었다.

민중의 권리투쟁 옹호 변호사 개업 후 일본내에서는 농민,노동자,부락민 등의 권리보호를 위해 투신하였고,국외에서는 조선,대만 등 식민지에서의 민족 및 민중의 권리보호를 위한 각종 사건에 투신하였다.

주요한 사건
도쿄시 전기공사 요금인상 반대소요사건(1906년),
도쿄시 전기공사 파업투쟁(1911년) , 쌀소동(1918년),
천주 사건,가마이시 광산,아마오 동산,야하타 제철소 파업사건(1919년), 군대 적화 사건(1921년), 제1차 공산당 사건, 간토대지진의 아마카스 사건, 박열 대역사건(1926년),  조선 공산당 사건, 대만 농민조합 소요사건등이 있다.

3.15사건- 가장 파장이 컸던 사건으로 일본 공산당에 대한 대대적 탄압이 있었던 1932년에 일어난 사건, 후세는 이때 법정에서 권력을 격렬하게 비판한 죄로 법정모독의 징계를 받고,변호사 자격을 박탈 당하였다. 1933년에는 신문지법 위반으로 금고형 3개월의 형을 받고. 1939년에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일본 패전후 변호사 자격을 다시 회복 하여 미타카 사건,마츠가와 사건,피의 메이데이 사건 등 사회운동에 다시….

후세 다쓰지의 조선에서의 활동
한국병합을 일본 제국주의 침략으로 규정한 후세는 한국 독립 운동과 민중 운동을 지지하여 1911년에 <조선의 독립운동에 경의를 표함〉이라는 글을 써 일본 경찰의 조사를 받았다.

독립운동가 변호
1919년 -재일 조선 유학생들이 선포한 2.8 독립선언의 주역 최팔용,송계백등 조선청년독립단의 변호를 맡음.

 
   
 
 
                         1919년 2.8 독립선언문을 작성한 제일본 동경의 청년들

1920년- 의열단으로 일본 황궁에 폭탄을 던진 이중교 투탄의거를 일으킨 김지섭 의사의 변호를 맡음
1923년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이 일본정부,일본군,경찰에 의한 조선인 폭동조작이었음을 비판해 요주의 인물로 지목.
1926년-일왕가 암살을 기획했단 혐의로 체포된 박열,가네코 후미코의 변론을 맡음.
동양척식회사 -일본이 회사를 설립해 토지 조사를 명분으로 조선인들의 토지를 강탈하자 나주 농민 510만평 토지반환소송을 제기,총독부의 토지조사 행위를 합법을 가장한 사기로 규정하였다. 천민차별철폐를 위한 단체인 형평 운동에 참여. 조선,대만의 식민지 민족문제와 계급,신분 차별 문제등에 참여.

재일 한국인 사건 변호
광복후 한신교육투쟁사건,도쿄 조선 고등학교 사건등 재일 한국인과 관련된 사건의 변론을 도맡았다. 1946년에는 광복된 한국을 위해 《조선건국 헌법초안》을 저술하였다. 
한편 현재 건국훈장을 받은 외국인은 중국인 31명,영국인 6명,미국인 3명,아일랜드인 3명, 캐나다인 1명 등이 있다.   그리고 그가 변호한 인물 가운데엔 아직도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독립운동가 박열과 그의 일본인 아내 가네코 후미코 부부가 있다.

후세는 1919년 2월8일 도쿄에서 2.8독립선언을 했던 `조선 청소년 독립단’사건에 자진해서 변호사로 나서면서부터 독립운동과 연계된다. 그뒤 그는 -박열 부부의 일본왕 암살 미수사건(1923년) ,-20년대 일본인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의열단 단원 체포사건(1923년) , -일본 왕궁에 폭탄을 던진 김지섭 의사의 `일본왕 시해 미수사건'(1924년)등 독립투사의 변호를 도맡다시피했다.

특히 일본이 동양척식회사(동척)를 내세워 1926년 전라도 궁삼면(지금의 나주)의 농지를 수탈하려던 때 직접 현지조사까지 마치고 동척을 향해 `합법적인 사기’라는 주장을 펼쳐 결국 총독부가 농민들과 협상에 나서게 하기도 했다. 후세는 또 1923년 9월 관동대지진때 일본경찰이 `조선인폭동설’ 등 유언비어의 진원이었음을 밝히고, 조선인학살에 책임을 통감한다는 사죄문까지 발표했다.

3.1운동때는 `조선독립운동에 경의를 표한다’는 논문을 발표, 일본 검찰에 불기소되었고 독립운동에 대한 지속적인 지지활동으로 끝내 변호사 자격까지 박탈당했다.

   
 

농촌에서 태어나 메이지법률학교를 졸업하고 도쿄에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한 후세는 톨스토이에 심취하고 인권운동에 관심이 많았던 사회주의계열의 변호사였다.

조선 독립운동사에서 빠짐없이 등장한 후세의 노력은 국내에선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본에선 `일본 변호사 100인’에 꼽힐만큼 활발한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제작진은 고통받는 조선인만큼 낮아지려했던 후세, 일본인이면서도 `식민지 동포와 함께 그 해방을 바라고 있다’고 했던 그를 매개로 지배와 피지배라는 관점으로만 바라보았던 한일역사를 보다 폭넓게 들여다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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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변호사 후세 다츠지(布施辰治;1890-1953)의 사상
-살아야 한다면 민중과 함께, 죽어야 한다면 민중을 위해-

 
   
 
 
 

1.자기혁명의 고백(1920년 5월)
인간은 누구든 자신이 어떠한 삶을 살아나가는 것이 좋은가에 대해 진정한 자신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이는 양심의 소리이다. 나는 그 소리에 따라 엄숙히 ‘자기혁명’을 선언한다. 사회운동의 급격한 조류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종래의 나는 ‘법정의 戰士라고 말할 수 있는 변호사’였다. 하지만 앞으로는 ‘사회운동에 鬪卒한 변호사’로서 살아갈 것을 민중의 한 사람으로서 민중의 권위를 위해 선언한다. 나는 주요 활동장소를 법정에서 사회로 옮기겠다.

(다음과 같은 사건에 대해서만 변호활동을 하겠다)
1.관원에게 무실한 죄, 부당한 부담을 강요받은 사람의 사건
2.자본가와 부호의 횡포에 시달리는 사람의 사건
3.관헌이 진리의 주장에 간섭하는 언론범 사건
4.사회운동에 대한 탄압과 투쟁하는 무산계급의 사건
5.인간차별에 맞서 투쟁하는 사건
6.조선인과 대만인의 이익을 위해 투쟁하는 사건

2.무산계급으로부터 본 조선해방문제(1923년 4월)
한일합방은 어떠한 미사여구로 치장하더라도 실제로는 자본주의적 제국주의의 침략이었다. 오늘날 일본 자본주의 아니 세계 자본주의는 아직 무너지지 않고 더욱 단말마적인 폭위를 떨치고 있다. 자본주의적 제국주의로 인해 침략당한 조선민중이 더욱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그런데 소위 민중의 착취와 압박에 죽어가는 것은 조선민중만이 아니다. 세계의 무산계급이 착취당하고 극도의 압박을 받아 죽어가고 있다. 유독 조선민중의 착취와 압박이 눈에 띄는 것은 무대가 무대인 점과 미명 아래 병합된 병합이 실은 너무나도 선명하고 참혹한 잔학상을 폭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민중에 대한 착취와 압박이 특히 눈에 띄는 이유는 그 나름대로 특별한 문제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철저한 무산계급의 문제는 원래 세계적인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이를 구체화하는 도화선이 된 것은 바로 무대와 기회, 그리고 사실에 있어서 일반에게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조선민중의 해방운동은 통절하게 우리 일반 무산계급의 마음을 울리고, 조선민중이 철저한 무산계급 해방운동을 전개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나는 이러한 의미에서 조선민중의 해방운동에 특단의 주의와 노력을 바칠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

3.신문기사;표면의 개발은 기실 조선민족의 행복은 아니라는 것을 늣겼소(入京한 布施辰治氏談, {동아일보} 1923년 8월 3일)

내가 이번에 조선에 온 것은 가장 굶주린 사람이 가장 절실하게 먹을 것을 구하듯이, 가장 비참한 생활을 한다는 조선 사람들을 만나보면 인간생활이 개조되지 않으면 안될 이상에 대해 깨닫게 될 것이 많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가장 궁경에 빠진 조선에 와서 조선 사람과 만나보는 것은 가장 의미가 깊습니다. 조선의 경치를 구경하러 온 것이 아니라 조선 사람의 기분에 접촉하고자 한 것이 내 방문의 주요한 목적입니다.

4.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에 대한 일본 당국의 태도를 비판하면서(1924년 11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너무나도 무서운 인생의 비극입니다. 너무나도 가혹한 비극이엇습니다. 특히 그 중에는 조선에서 온 동포의 마지막을 생각할 때 저는 애도할 말이 없습니다. 도 어떤 말로 추도하더라도 조선동포 6천의 유령은 만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을 슬퍼하는 천만개의 추도의 말을 늘어놓더라도 그 사람들의 무념에 가득 찬 마지막을 추도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학살은 계급투쟁의 일단이었습니다. 우리의 동지가 죽음을 당한 것도 6천의 동포가 그러한 처지에 직면한 것도 우리가 계급투쟁에서 패배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졌습니다. 너무나도 억울합니다. 왜 우리가 졌는지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5.조선의 산업과 농민운동(1926년 4월)
일본제국의회 등에서는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유감을 표명하고 있으나, 산업관계에 대해서는 통계숫자를 들면서 치적을 선전하고 있다. 식민지산업에 대한 근본적인 의혹은 아무리 산업이 발달하고 농업시설이 개선되어도 그것이 식민지 동포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총독부의 정치는 경찰력을 동원한 일본 본위의 정치이기 때문에 식민지 산업의 수확은 본국으로 이송되고 있다. 나는 소위 식민지정책이란 것에 대해 반대함과 동시에 식민지 동포와 함께 해방을 바라고 있다.

그들이 자랑하는 조선농업의 발달이 과연 조선무산계급을 위한 것이라면, 농업의 발달을 위해 땀 흘린 조선 무산계급 농민의 생활이 차츰 좋아져야 한다. 하지만 실제 생활이 더 어려워지는 연유는 무엇인가? 조선 무산계급 농민의 피와 땀으로 일구어진 조선의 경작지가 그들의 손으로 경작되지 못하고 조선을 버리고 일본이나 만주로 나아가 유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조선의 산업이 관헌 당국이 자랑하듯이 통계적으로 발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 무산계급 농민의 생활은 더더욱 어렵게 되었다. 조선무산계급 농민의 노력으로 생산된 쌀과 보리, 기타 잡곡이 그들을 배불리 하지 못하고 굶주려 자살하거나 자포자기하여 범죄자를 만들어내는 연유는 무엇인가..

조선 땅에서 생산된 농산물이 농업의 개선과 발달의 결과 수량적으로 많아지고 또 질이 향상되더라도 그것이 모두 식민지 본국으로 유출된다면, 조선 무산계급 농민의 생활은 조금도 향상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들의 피와 땀으로 일구어낸 기름진 쌀과 보리 등의 생산물리 자신들의 배를 채우지 못하고 전부 유출되는 것을 보고 슬픔과 애달픔만이 늘어갈 것이다. 더욱이 수출된 쌀이 돈이 되어 조선 무산계급 농민에게 되돌아오는 것도 아니다. 그 이유는 일본인 대지주의 소작지이기 때문이다. 유출된 농작물은 다시 일본인의 손에 남게 된다.

조선 무산계급 농민은 결국 조선 땅에서 살지 않으면 안된다. 또 동시에 살아나가기 위해서는 일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다면 일할 수 있는 토지가 없으면 안된다. 여기로부터 배제된 자는 소위 농민운동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조선의 농민운동은 일본처럼 소작료문제를 중심으로 하지 않고 토지소유권의 회수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는 조선의 농업시설의 발달을 위해 희생된 조선 무산계급 농민의 토지소유권이 수탈되었기 때문이다. 토지소유권 회수를 목적으로 한 조선의 특수한 농민운동은 비단 궁삼면에 한정된 문제만은 아니다. 조선의 농민운동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주목해야 한다. 조선문제 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다. 단지 토지소유권의 회수라는 것에 머무른다면 해방운동의 의의는 절감된다. 하지만 현재의 조선총독부와 일본인 지주는 농민운동의 목적인 토지소유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극심한 탄압을 가하고 있다. 생활고에서 출발한 농민운동은 계급해방전선으로 합류될 것으로 확신한다. 소위 식민지의 산업정책이란 것을 응시하여야 진정으로 조선문제가 조선농민의 손에 의해 해결될 것이다.

영화 ‘변호사 후세 타츠지(布施辰治)’ 완성 – 재일 역사도 선명히 그려
후세 타츠지(왼쪽)가 대심원에서 변호하고 있다. 영화의 한 장면.

사회 저변에서 학대받던 민중의 입장에 서서 많은 재일동포로부터 존경 받은 후세 타츠지(布施辰治,1880~1953)의 생애를 그린 더큐멘터리 영화 ‘변호사 후세 타츠지'(이케타 히로오=池田博穗 감독, 1시간 37분)가 최근 완성됐다. 완성 유료 시사회가 28일 나카노ZERO 소강당에서 열린다.

영화는 일본의 패전 직후 암시장에서 시작된다. 당시 정규직을 갖지 못해 빈곤의 나락에 빠진 재일동포에게 있어 밀조주는 살기 위한 수단으로서 불가피했다. 후세 변호사는 일본 당국으로부터 적발 받은 재일동포를 위해 나서서 변호를 맡았다.

2·8 독립운동(1919년)에서는 출판법 위반으로 기소된 유학생 9명을 무보수로 변호했다. 칸토대진재 당시 저질러진 조선인 학살의 진상 규명을 위해 목숨을 걸고 국가 권력에 맞섰다. 또, ‘대역사건'(1926년)으로 기소된 박렬(朴烈), 카네코 분코(金子文子)를 위해 대심원에서 변호에 나선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한국에서는 강제병합에 반대한 후세 타츠지의 당시 격려 연설 풍경을 천도교회에서 재현했다. 전라남도 나주에서는 조선총독부의 토지 매수에 대해 반환 청구를 낸 농민으로부터 청취 조사하는 모습도 담았다. 당시 농민의 차림으로 후세 변호사에 호소하는 지역 엑스트라의 모습은 연기라고 생각이 안될 정도로 사실적이다.

재일동포와 일본인의 식자가 다수 영화에 등장해 같은 눈높이로 후세 변호사상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도 눈여겨 볼만하다. 밀조주 사건 당시 후세 변호사의 가방을 들고 다녔던 재일동포 신창석(辛昌錫)씨는 "변호해도 마차비밖에 받지 않았다"며 청렴한 후세 변호사의 사람 됨됨이를 증언하고 있다. 강덕상(姜德相, 재일한인역사자료관)씨도 인터뷰에 응해 "당시 세상의 어둠을 봤을 때 후세와 같은 존재가 얼마나 빛났을까"라고 이야기했다.

이케다 감독은 "일본과 한국, 아시아가 보다 사이 좋은 관계가 됐으면 하는 생각에 제작에 들어갔다. 후세씨는 알면 알 수록 그 사람 됨됨에 빠져들게 됐다"고 심경을 밝혔다. 제작위원회에 참여한 재일동포로부터는 "이 영화는 우리 100년의 역사 그 자체다. 보면서 숨이 막히는 장면이 많았다. 집에 돌아가면 앞장 서서 자주 상영 운동을 펼치고 싶다"는 의견이 들렸다.

문의 : 후세 타츠지 제작위원회 (전화:03-5840-9361)

조선인 민중과 함께 산 인권변호사 후세타츠지(布施辰治)의 업적 재조명
기획책임자 히구치(樋口雄一)씨

‘재일과의 공존의 표본으로’

식민지하의 한국에서는 독립을 호소하는 민중을 목숨걸고 변호하고 해방 후에도 재일한국·조선인 등 사회적 약자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평생을 바쳐온 인권변호사 후세타츠지(布施辰治)의 행적을 현창하는 ‘기획전’이 도쿄 신쥬쿠 소재의 고려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다.

전시품은 후세타츠지의 한국·조선과의 관계에 국한하여 26장으로 정리한 판넬이 중심. 눈에 띄는 것은 해방 직후의 혼란기, 생계를 위해 막걸리를 밀조하다 검거된 동포에 관한 방대한 변호자료이다. 또한 재일한국거류민단의 창단에 관여한 당시 임원의 변호에도 적극적으로 관계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칸토대지진이 발생했을 때 서로 알게된 박렬(朴烈) 초대단장에 관한 자료도 많다.

이러한 자료는 히구치(樋口雄一)씨를 중심으로 한 연구자들이 제작위원회를 구성, 후제타츠지가 태어나 자란 미야기현 이시노마키시(石卷市) 등에 거주하는 친족과 이시노마치문화센터, 모교인 메이지(明治)대학, 한국 나주시청 등지에서 모여 1년 가까이 준비했다. 후세타츠지가 법정에서 착용한 법복(복원한 것) 및 2004년에 한국정부로부터 일본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받은 건국훈장도 전시되어 있다.

관내에 비치되어 있는 노트에는 ‘전중·전후 조선인을 위해 힘쓰 사람이 있었다니 감동했다’, ‘일본의 전쟁 전에도 기골이 있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되니 기분이 고양된다’ 는 등의 감상을 볼 수 있었다. 기획책임자인 히구치씨는 "그 엄청난 시대에 조선인과 연대한 일본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좋겠다. 일본인이 앞으로도 ‘재일’과 공존해 나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생각하게 하는 좋은 표본"이라고 말했다.

8일 오후 2시부터는 작가 고사명(高史明)씨가 ‘후세타츠지와 재일조선인인 나’라는 제목으로 고려박물관 앞 신쥬쿠니시(新宿西)교회에서 기념강연을 실시한다. 기획전은 10월21일(오후 12~17시)까지. 입장료 400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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