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이후 부활절 까지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은 무엇인가?

             사순절 이후 부활절 까지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은 무엇인가? 

마가 4; 35-39 ;요 6:16-21

=배안 갇힌 제자들의 고립주의와 패쇄성을 넘는 예수님의 하나님나라에로의 열린 항해 =  

   
 

 “그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마가4:35).

모든 여행이 확대 될려면 바다를 건너야 합니다. 

갈릴리의 호수 저편은 친숙한 유대인들이 사는 곳이 아닌 바로 낯선 이방인의 땅이었습니다, 예수님에서는 호수를 건너 저 이방인이 살고 있는 게라사 그리고 두로 시돈등 이방 땅으로 넘어갈 때 예수님의 본격적인 사역이 시작되고 확장되는 것입니다, 

   
 

 신약성서에는 갈릴리 호수의 선교여행 이야기가 대개 3 장면으로 겹칩니다

첫째로 가장 유명한 항해이야기는 바다 한가운데 풍랑을 만날 때 "우리가 다 죽게 되었다!"는 제자들과 풍파를 잠잠케 하신 예수님의 이야기이고 

두번째 갈릴리 호수 횡단 여행 장면은 갈릴리 호수 위를 걸어서 오신 예수님과 혼비 백산한 제자들에게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시는 장면의 이야기이고

세 번째 장면은 오늘 장면으로 제자들이 급히 배에 타느라고 빵을 한 개 뿐이가지지 못하고 탔기에 선교여행 내내 빵 걱정을 하는 장면입니다.

 " 18.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19.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   (요 6:18-19)

 그런데 이처럼 바다를 건너 이방땅으로 넘어갈 때 거기에는 반드시 풍랑을 만난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풍랑을 만나 배가 뒤집어질 정도라고 했습니다,

마가 4;37-39절에 이 풍파와 그것을 잠잠케 하신 모습이 더욱 실감나게 나와 있습니다.

 “ 37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39.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 (마가 4;37-39) 

우리는 이 풍랑의 바다 가운데 벌벌 떨고 있는 제자들과 풍랑가운데서도 주무시고 계신 예수님을 볼수 있습니다,

그러나 풍랑이 일면 바로 제자들 처럼 아우성을 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여풍랑보다도 더욱 사람들을 혼란과 혼돈으로 몰아 갑니다, 사실 우리 인생에서 풍랑이 일때 이 풍랑보다 더 무서운 것이 바로 사람들이 우왕자왕 자충우돌 그리고 이합 집산하여 더욱 우리를 혼란과 혼돈속으로 몰아가는것이 더욱 두려운 일입니다.

 우리는 이 본문에서 광풍은 간단하게 자연의 한 현상으로 보아서는 안됩니다,  오늘 해상에서 예수와 제자간의 기나긴 갈등이 시작이 됩니다, 하나님 나라 운동의 방향을 향한 갈등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 본문에서 예수님을 묘사하는 핵심단어는 "바다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는것!"이고  제자들의 핵심 단어는 "파도와 두려움"입니다.

바다를 앞에 두고 제자들의 고립주의 노선과 예수님의 개방주의 노선이 갈등을 빚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여기가 좋사오니 선교를 유대인들에게 한하고 바다를 횡단하지 말자는 것이고  예수님은 바다를 횡단하여 이방인에게 나가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자들의 고립주의는 왜 위험합니까?

<총, 균, 쇠>로 유명한 진화생물학자 제레드 다이아몬드는 우리에게 진화 생물학자로 고립된  "오지의 비극"을 전해 죽고 있습니다. 오지가 평화스러울것 같지만 진화 생물학자의 증언에 의하면  이렇게 고립 퐤쇄된 공동체는 늘 서로 준 전쟁 상태라는 것입니다,

 정글의 법칙의 병만족이 방문한 와오라니족은 인류학자가 8대까지 조상을 조사해보았는데 단 두 명만이 자연사했고, 나머지는 모두 살해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마존의 야노마미족에는 40살을 넘은 남자가 없고 남자는 40세가 되기 전에 죽는게 보통이라는 것입니다. 서로 싸우고 적을 만들다가 결고 서로 망한다는 것입니다,고립된 사람은 반드시 그 안에서 그 내부에서 적을 만들어 냅니다,  빨갱이사냥, 마녀사냥, 낙인찍기에 골몰하고 상대의 약점을 찾아내어 누구든 적을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18.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19.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요한 6:18-19)

 이 고립주의는 어디서 비롯되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공포에서 시작됩니다,

공포 마케팅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공포마케팅이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불안감 등을 자극하여 구매를 하게 만드는 마케팅입니다.

예를 들면 보험이나 의약등을 들 수 있습니다.

보험은 곧 다가올 우리의 미래에는 약 "10억원 정도가 있어야 사람답게 살 수 있다" 라고 노후를 위해 지금 부터 연금을 들어야 한다고 경고하고 있는것 입니다.

헐리우드 영화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제 곧 지구의 종말이 올지 모르니 대비하라는 강한 공포의 메세지를 담고 있습니다.

학원도 마찬가지 입니다.

자신의 자녀가 학원을 다니지 않아서 다른 학생들 보다 뒤쳐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학부모의 불안감을 이용하죠…이것이 학원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것이 공포마케팅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공포마케팅 즉 40년 간 지속된 공포마케팅은 북한의 위협 입니다,  

   
 

 이러한 공포 마케팅이 바로 오늘 우리 나라를 고립 폐쇄주의로 몰고 가는데  여기에는 종교도 예외가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교가 바로 이러한 전형적인 공포심 유발 마케팅을 했는데   유대교와 같은 낡은 보수적 종교가 쓰는 공포마케팅의 대표 선수가 바로   바로 서민들을 죄인으로 몰고 그들은 사회적으로 격리 배제하는 것입니다,  

우리 종교 생활도 안믿으면 지옥간다 안믿으면 집안에 화가 온다    이러한 죄를 자주 들먹겨려 공포를 마케팅하는 종교는    가장 낮은 수준의 종교임을 우리는 빨리 깨달아햐 합니다,

예수님과 유대교의 갈등이 바로 이러한 죄와 공포 마케팅에 대한 다른 입장때문입니다.   죄인의 의미는 우리가 완전하지 못하다는 그러므로 서로 용서해야한다는 실존과 겸손의 의미로사용되어 궁극적인 목적은 용서와 해방으로 사용되어져야하는 언어이지 공포 마케팅의 대상이 사용되어서는 안된다는 것 입니다.

 이러한 죄인과 빨갱이와 같은 공포 마케팅의 표상을 자주 쓰는 국가나 종교나 심한 체벌의 공포를 통해 가정을 다르리려는 수준 낮은 국가와 종교와 가정의 지도자들은  빨리 퇴출시켜야 합니다. 

   
 

 그리스도대학 이오갑 교수(그리스도대학)가 새길기독교사회문화원 정기포럼서 발제한국교회를 향해 자기중심적인 유아기적 모습을 버릴 것을 주문했습니다.

그는 ‘유아기적 한국교회를 말하다’란 주제의 강연에서 "한국교회는 외형이 성인 같이 커졌지만,   정신이나 하는 일은 여전히 미숙하고 어리석어서 미래에 대해 점점 더 회의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교수는 이어 "한국교회 교인들은 자유롭고 주체적인 신앙을 하지 못하고 있다"면서   "유아기적 한국교회는 자기 속에 묻혀 세상과는 담을 쌓고 살아가는 고질적인 병폐가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덧붙여, "약자, 빈자, 소수자들의 인권이나 생존 조건 개선 등 봉사나 희생에는 역동적이지 못하며  자들이 아니라면 교회와는 상관 없는 일로 여긴다"고 말했다 합니다.   전형적인 성속 이원론에 빠져 사회내 구성원으로서의 책임 주체이기를 포기했다는 지적인 것 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1세기의 예수님의 하나님 운동당시  열린세계로 방향성을 잡은 예수님과 닫힌 세계의 고립주의 모드로 잡은 유대교와 예수의 제자 사이에서의 갈등과의 전쟁이 치열했던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과 계속 부딪히는것이 바로 예수님의 열린 항해와 그 배안에서의 제자들의 고립주의와 폐쇄성이 계속 부딪히고 있었던 것 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던 사순절 예수와 제자들 사이의 갈등이 바로 오늘 우리가지내는 이 사순절 십자가의 고난의 참 비밀이고 실절적 내용이었던 것 입니다.

 예수님은 이 제자들을 이 고립과 자폐에서 대지로 바다로 끄집어 내어 계속 하나님 나라의 행진과 항해를 계속하게 해야만 했고제자들은 두려움과 공포로 그 십가가의 길에서 도망가려고 했던것이 바로 이 사순절을 향한 기간의  바다에서 풍랑사건의 핵심인 것입니다.

 "20.가라사대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신대

21.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저희의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 (요 6:20-21)

 그리고 결국 예수가 제자들에게 가르치시려 했던것은 바다를 넘어 계속 길을 떠나고 계속 나서고 전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과 함께 하는 우리의 여행에서도 이것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 한국 교회를 이 고립되고 자폐된 어두운 공포와 불안의 세계에서 햇빛에 외부에 노출 시켜야 하고 배를 띄워 바다로 항해를 내 보내셔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사순절 이후 부활절 까지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은 무엇인가?

오늘 본문은 우리가 이사순절에서 부활절 까지의 항해를 어떻게해야 할것인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갈길은 제자들처럼 영적 유아기에 갇혀 고립주의에 갇히는냐 아니면 예수님처럼 성숙한

성인이되어 바다로 해양으로 바다를 열고 하나님 나라의 여행길을 계속가고 있느냐를 묻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의 길을 계속 열고 갈수 있으려면 우리는 풍파와 파도의 두려움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바로 예수님에게 바다를 풍랑을 잠잠케 할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

바로 우리로 파도와 풍파의 두려움을 이기고 이 항해의 향후를 자우 할줄로 믿습니다,

정말로 이 고난의 사순절 기간 파도를 잠재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지금 이시간 그 믿음으로 물 위를 걷어서

“가라사대 내니 두려워 말라” (요6:20)고 하신 예수님을 믿을수 있고

그러한 믿음은 오늘도 우리로 두려워 말라는 예수님을 만나며 

이 하나님 나라의 항해를 계속하게 할 용기를 갖게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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