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고영근의 책에 대한 숨은 열정 >
“요즘은 무슨 책 읽냐?”며 방문을 여시던 아버지 고영근.
“네. 이런 책을 읽고 있어요.”
그러면 당장에 토론하자 하시는 통에
“네? 글쎄. 그게…”하고 얼른 도망가 버렸던 매정한 막내딸.
까칠한 딸을 둔 덕에 씁쓸해 하셨던 아버지 고영근.
책읽기를 좋아하던 아버지…
사상계가 전집으로 우리 집에 온 날,
아버지는 아주 그것도 아주 해맑게 웃으셨다.
너무나 뿌듯해 하시던 아버지의 모습.
“아버지, 그렇게 좋으세요?”
아예 말씀도 못하신다.
웃으시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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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 방에 마련된 고영근 목사님 서재입니다. 맨 위에 있는 사상계를 사시고 어찌나 행복해 하셨는지 … 책을 너무나 좋아하셨는데 … | ||
유난히 기억력이 좋으신 탓에
한 번 읽으면 절대 잊지 않으시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의 서재를
나는 한 번 휙!
훌러덩 뒤집어 놓은 적이 있었다.
요지는 너무 산만해서였다.
아버지가 부흥회 가신 날 아침,
난 아버지와 상의도 없이
아버지의 서재에 놓여 있는 책을
주제별로 죄다 정리를 해 버렸다.
주제별로 정리해 놓으면 찾으시기
더 편할 것 같았다.
책이 두 겹, 세 겹으로 꽂혀져있는 것이
못내 마음에 안 들어서
내 책도 아니건만
과감히 바꾸었다.
내 나름대로는 꽤나 바빴다.
주제별로 묶고,
시대별로 묶고 나니
빠진 부분들이 보였고
이를 보충하기 위한
책의 구입목록을 작성하고….
난 무쟈게 칭찬받을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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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일함에 들어가 있는 것이 19509년대, 1960년대 목사님께서 쓰신 노트들입니다. 빼곡한 글씨가 한 번 흐트러짐이 없이 가지런히 누워있습니다. 전 이것을 보고 목사님은 기인이구나 생각했습니다. | ||
그….러….나…
아버지는 버럭 화를 그것도 아주 많이 내셨다.
아버지는 구석구석에 박혀 있던
책 한 권까지도
그 위치를 정확히 기억하고 계셨고
참고할 일이 있으면 바로 찾을 수 있으셨기 때문에
산만한 책배열이 그에게는 유용한 체계였다.
아버지가 갖고 계신 나름대로의 체계를
한 마디 상의도 없이
까칠한 막내딸이
난데없이 뒤바꿔 놓은 것이다.
사고뭉치 막내딸이었다.
그 때 그 일 덕분에
나는 아버지가 주로 어떤 책을 읽으셨는지,
아버지 서재에는 주로 어떤 책들이 중요한 책이었는지를 세세하게 기억한다. 이런 걸 전화위복이라 하나?????
그 덕분에
나는 아버지를 더 가까이, 더 자세히 알게 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혼나고 나서도 나는 또 정신 못 차리고
이번에는 오랫동안 수집해 놓은 신문을 하나씩 정리했다.
목적은 버리기 위해서였다.
대체 이 많은 신문들을 왜 집에 두시는지 이해를 못하였다.
국회 도서관에 가면 죄다 마이크로 필름에 저장이 되어있다고
누누이 말씀드려도 미동도 안하신다.
우리 집 지하는 1960년대 신문부터 1980년대 신문까지 저장해 놓은 저장창고였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 크리스챤 신문, 기독공보….
엄마가 짜 놓은 앵글에
아버지는 차곡차곡 신문을 집어 넣으셨다.
이 관리는 모두 내 몫이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내 일을 줄이자 하고.
그런데 부흥회 가셨던 아버지가 갑자기 전화를 하셨다.
두둥.
어찌 내가 일을 벌인걸 아셨을까?
그러나 아버지는 다른 용무였다.
1969년 신문을 찾아서 삼선개헌 지지자들 서명한 기사를 찾아서
지지자들의 이름을 불러달라는 것이었다.
엥? 쿠궁.
그러나 다행히도 아직 안..버..렸..다.
“아버지, 못찾겠는데요? 그런데요 이런 건요 국회도서관에 가면 다 있어요”
나는 의기양양하게 국회도서관을 갔다.
짜잔. 하고 마이크로 필름을 보는 순간 어이상실이었다.
삼선개헌 지지성명을 발표한 지지자들의 서명란만 삭제되어 있었다.
아버지는 몇 년, 몇 월, 몇 일자 신문 몇 면 상단에 나와 있다는
자세한 정보까지 말씀해 주셨다.
지지자들 대부분을 기억하는데
몇 명이 가물가물 한다는 것이었다.
애고. 아버지 일 못해먹겠다 싶었다.
그래서 집에 와서 일일히 죄다 뒤져서 찾아내었다.
신문보관, 자료보관의 중요성을 그 날 처음 알았다.
아. 이래서 아버지가 자료보관을 이렇게 철저히 하시는구나.
(이제서야 말이지만 신문저장창고는 저장 뿐 아니라 수배중인 분들을 숨겨 주는 등 나름대로 참 용이하게 쓰였다.)
그러나 어느 여름 날. 비가 몹시 많이 오던 해에 우리 집 지하는 물에 잠기고 말았다.
참 아까운 자료들을 잃었다. 그 와중에도 아버지의 1950, 60, 70년대의 자료들이 살아남아 있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은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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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상위에는 잔뜩 편지들이 있습니다. 1980년대 1990년대 2000년대 재소자들의 편지들이 빼곡히 있어서 연도별로 구분하고 있는 중입니다. "내가 퇴비가 되어야 통일밥이 되지…."로 시작하는 시가 있더군요. 한결같이 통일에 대한 염원이 가득한 편지들… 정리하면서도 감동의 물결입니다. | ||
세월은 되돌아 1970년대.
매사에 본을 보이기를 진심으로 하였던 아버지 고영근.
자녀들에게 책을 읽히는 것까지 세심하게 챙겼다.
요즈음의 아빠는 아이들이 잠잘 때 동화책을 읽어준다고 한다.
그에게는 그러한 기회가 없었다.
너무나 바쁜 덕에,
박정희의 긴급조치 덕에,
하나님의 예언자적 사명을 다하려는 그의 진실함 덕에….
그러나 그는 아이들의 성장에 세심한 배려를 잊지 않았다.
자녀들이 그 시기에 꼭 봐야 할 책들을 선정해 주는 자상한 아버지인데….
그런데 그는 그의 품성이 항상 말해주듯,
스스로 본을 보인다.
본인이 우선 책을 읽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였고
책 읽는 즐거움과 연령대에 필요한 책읽기의 중요성을 설득시키려 노력하였다.
어머님이신 한완수 사모 역시 살림살이가 날로 힘들어져 가는 것을 보완하기 위해 부업을 하게 되었는데 그 일이 ‘강서서점’을 열었던 일이다.
자녀들에게 책을 읽히는데 어려움 없는 환경을 마련해 주고자 하는 부모님의 배려가 빛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지 않았다면 이건 순전히 내 탓이다. ㅠㅠ
성진, 성숙 성휘에게 보낸다
우리를 구속하려고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우리 주 예수님께서
우리 가정 온 식구들과 우리를 돕는 여러분들에게
크신 은총을 충만이 주시기를 기도하며 이 편지를 쓴다 .
성진이는 공부하기에 심히 피곤하겠으나
열심을 내어서 공부하여
얼마 안 남은 기간에 원만한 준비를 하기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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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작은 책들은 1950년판 성경입니다. 중국어 성경인데 목사님은 이것으로 틈틈이 성경을 외워오셨지요. 한문으로 정리했기에 그 많은 구절을 다 외울 수 있었나 봅니다.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어찌 성서를 다 외운단 말입니까? | ||
아버지가 여기에서 읽은 책 가운데
김형석 교수 에세이 7권(고독이라는 병)에
‘진에게 주는 글’이란 제목을 읽고 느끼는 바가 많았는데
네가 반드시 읽기를 바란다.
대학교를 지망하는 학생에게
참으로 필요한 글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니
어머니께서 책을 찾아 가는대로 두 번 가량 읽기를 부탁한다.
그리고 항상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경건한 생활과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숭고한 사명감으로 살며
공부해야 하는 것 잊지 말아라.
이 아버지는 네가 좋은 학교를 나와서
내가 하고 있는 위대한 선교사업을 계승해 나갈 수 있기를
하나님께 항상 간구하고 있다.
반드시 승리와 영광을 쟁취하여라…..
……
광주에서 아버지로 부터 (1978. 7.27)
하나님의 아들 성진에게
모세의 하나님이시며 다니엘의 하나님이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사랑하는 성진이와 우리 가정을 축복해 주시기를 기도하면서
이 편지를 쓰는 바이다.
며칠 전에 너희 편지를 받아 보고 무척 기뻐하였다.
너의 편지 내용을 보니
네 지식과 신앙과 인격이 많이 성장된 것으로 믿어
대견스러움을 금할 수 없구나.
입학 시까지는 아버지께 편지 안 해도 좋으니
다른데 마음 쓰지 말고
공부에 열심 하기 바란다.
너무 지나치게 긴장하지 말고 침착하고 태연스럽게 응시하여라.
네 실력에 지나친 학교를 선택하지 말고
힘에 알맞은 학교를 택하기 바란다.
학과는 네 소질대로 택하기 바란다.
아버지 생각으로는 네가 신학공부를 위하여
영어, 역사학, 철학, 사회학 등에서 과목을 선택하는 것이
장차 목사로써 일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아버지는 내 생전에
우리 민족이 모~두 주님을 믿는 민족 복음화와
세계의 43억 인류가 복음화 되기 위하여
生死를 다 바쳐 일하려고 한다.
너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우리 민족과 세계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일하기를 바라며 기도하고 있다.
지금은 다른데 마음 빼앗기지 말고
학교 입학에 힘을 기울이고
앞으로 30세까지는 실력 배양에 힘쓰기 바란다.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활동을 많이 하다가
실력배양을 소홀이 해서
지금 후회가 막심하다.
지금 책을 열심히 읽으나
총명이 어두워져서 모~두 잊어버리니
안타까운 것뿐이다.
공부는 30세 전에 해야 한다고
뼈저리게 느끼고 있으니
너는 30세까지는 활동할 생각 말고
실력 쌓기에 힘을 쓰라.
아버지가 석방되면
하나님께서 허락하는 범위에서
몇 천권의 책을 사다가서
네가 공부할 수 있도록 후원을 하려고 한다.
세계인류를 복음으로 구원한다는
큰 뜻을 이루려면
옛날 모세와 바울 같은 지혜와 권능을 받아야 할 것이다.
2년이 넘는 옥중생활에서 독서를 통하여
많은 지식을 얻어서 무척 기쁘게 생각한다.
하나님 허락하시는 날
아버지는 과거보다 더욱 열심히
복음선교에 충성하고자 한다.
십자가 뒤에 부활이 있음을 믿고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자.
다니엘에게 지혜주신 하나님께서
성진이와 함께 하기를 기원하면서.
1978. 10. 13 광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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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와 같은 빼곡한 노트필기는 그 종류만도 30여종입니다. 옛날 주보들도 있고요, 목사님께서 모아오신 자료들이 소중히 보관되어 있습니다. 각 화일함에 실리카겔을 넣고 분리 보관했지요. 잘했지요? | ||
…..
성진이는 특별이 성경, 역사, 영어 공부에
더욱 주력하기를 바라며
1979. 5. 18 광주에서
사랑하는 성진에게
모세와 다니엘에게 지혜와 은총을 주신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아들 성진에게와
우리 가정을
축복해 주시기를 기도하면서
이 편지를 쓴다.
….
나는 네가 한국과 세계복음화를 위한
선교자가 되기를
지금도 희망하고 있다.
즉시 편지하고 또 면회도 오기 바란다.
여름방학동안에 세계사와 국사공부를 비롯하여
열심히 공부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아버지가 필요한 책을 사서 속히 우송하기 바란다.
<①한국역사 (0壇學會)
②한국현대사(新立文化史)
③種의 起源(다윈 著)
④國富論 (아담스미스)
지금 독서할 것이 없으니
편지받는 대로 우송하여라.
아무쪼록 우리 가정이
하나님을 위하고 인류와 나라를 위하는 가정으로
힘차게 前進하도록 최선을 다하여라.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義로운 者와 간구하는 자에
승리케 하심을 믿고
약진 또 약진하자.
1979. 6. 28 광주에서
성진, 성숙 성휘에게 보낸다
…
성숙이와 성휘는 방학이 된 줄 아는데
언제 한 번 시간을 내어서
광주에 오기를 바란다.
아버지는 너희들이 보고 싶어서
방학하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너희가 공부에 열심한다는
편지를 읽어보고
아버지는 무한히 기뻐하고 있는 바이다.
이번 여름방학에는
절대 시간을 허송하지 말라.
성환에 가지 말고
공부하는 방학기간이 되기를 바란다.
학교의 숙제를 빨리하고
집에 있는 위인전이나
여러 책들을 읽도록 하여라.
특히 성숙이는 이번 방학에 책을 안 읽으면
앞으로 독서할 기회가 없다.
고등학교에 가면
대학입시준비 때문에
일반서적을 읽기 어렵다.
네가 보고 싶은 책이 있으면
어머님께 말씀드려
사다가 보도록 하여라.
그리고 성휘는 공동번역신약성서를
꼭 읽고
위인전을 반드시 읽기 바란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일과
교회출석을 게을리 하지 말라.
집에 있으면서 아침 일찍 일어나
청소를 부지런히 해야 한다.
…..
| (고영근 목사님 추도회에 참여한 유족들…) | ||
하나님께서 우리나라를 축복해 주시기를 기도하며.
광주에서 아버지로 부터 (1978. 7.27)
1978. 10. 2 광주에서(그리고 이번 올 때 이광수 전집과 ‘동아연감’을 꼭 가지고 오시오)





